유대인과 한국인의 공부법
시중에는 유대인의 공부법에 대하여 언급한 내용들이 많이 있다. 유대인은 세계 인구 약 69억 명 중에 겨우 1,700만 명에 지나지 않지만, 그들이 세계 경제계를 주름잡고 있다는 말은 가끔 듣고 있는 바와 같다. 그들은 약 2,000년에 걸친 유랑생활 즉 일정한 영토 아래 국가의 형태를 띠지 못한 채로 생활해온 가운데에서도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결속하여 1948년 5월 14일 꿈에 그리던 독립을 하게 된 것이다. 이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국내 인구가 해외에 나가 있는 유대인의 수보다도 훨씬 적은 것이 이를 증명하는 한 예이다.
당시 나라를 잃었던 사람들은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었으며, 그 뒤로도 벌서 몇 대나 지난 세월이었지만 면면히 이어진 사명을 이루었다고 말하면 맞을지 모르겠다. 강산이 변해도 스무 번이나 변한 후까지 그들은 국가라는 개념과 민족이라는 개념을 확고히 하며 다져왔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더하여 몇 안 되는 소수자들이 어떻게 실체도 없는 조직을 통하여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세계 지도자의 대열에 서 있는 가는 단순한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라 할 수 있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이토록 강력한 하나가 되게 하였을까.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런 배경을 파헤치며 유대인의 정신을 연구한 후 나름대로의 결단을 내리고 있다. 그것들이 지금 우리 손에 들어와 읽혀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유대인이 직접 쓴 책 ‘공부하는 유대인’을 읽어보았다. 저자 힐 마골린은 부부가 모두 유대인이면서 한국인 남매를 입양하여 키운 사람으로서 자신들의 감춰진 일상을 한국에 소개하는 것은 남다른 사명감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책에 의하면 자신도 중요하지만 소속감을 가지며 항상 사회를 의식하는 면이 본받을만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요소인 공부하는 과정에서 어떤 사실을 암기하고 인지하는 것보다는 그 원리가 어떻게 생겨났으며, 그것을 하면 어떻게 되고 그것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말하자면 답을 알려주기 보다는 답을 스스로 찾아가는 공부법이라 할 것이다. 그 답이 틀리는가 맞는가는 그 다음 문제이다.
그들이 가장 많이 보는 책으로는 영원한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성경과 그에 버금가는 민간 교육지침서 즉 탈무드가 있다고 하였다. 종교서인 성경은 그렇다 치더라도 일반서인 탈무드는 직접적인 지시 교육보다는 풍자와 은유적인 표현을 사용하면서 감성을 건드리고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나와 우리와의 관계를 파악하며, 다시 공동체적인 이익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근래 들어 이런 방식의 교육을 지향하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당면한 문제를 풀어야 하는 입시위주의 교육에 밀리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이에 천재적인 소질을 가지고 태어났다느니 혹은 길러진 영재라는 아이들은 위의 유대인 교육방법에 준하는 교육이 있었다는 것을 자주 듣고 있다. 따지고 보면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이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태교 중에서부터 이미 사물의 원리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럴 즈음 나는 최근 출판된 ‘지금 공부하는 네가, 모두를 놀라게 할 것이다’라는 책도 읽었다. 이 책은 이투스교육주식회사를 통하여 교육에 대한 시스템과 방법을 논하는 사람이 쓴 것인데, 처음 제목을 보았을 때에는 위에서 말한 힐 마골린의 공부하는 유대인이라는 책이 연상되어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기대에 상반된 내용들이 나와 실망이 되었다. 저자가 전하는 바는 충분히 알겠는데, 내심 기대했던 내용이 나오지 않아 갈수록 흥미를 잃고 말았던 책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학생들이 왜 공부를 하여야 하며, 현재의 불편함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난 뒤의 성취감 혹은 성공을 그려보라는 책으로 분류할 수 있다. 말하자면 몇 년 고생하고 난 뒤 여러 해를 행복하게 살 것인가 혹은 현재의 달콤함을 못 잊어 더 많은 행복을 잃을 것인가를 선택하라는 취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중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부분을 찾아서 그 목표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문제 역시 지금은 수학능력 시험성적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대학에 합격하고 난 뒤에 어떻게 하면 그 꿈을 실현할 것인가를 논하는 수준으로, 역시 답은 대학 합격이라는 명제를 깔고 있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입시위주의 공부 혹은 공부의 필요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이스라엘보다 인구도 많고 교육열도 더 높은데 왜 이스라엘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일까.
피론하고, 공부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보자. 공부란 인류의 행복과 평화 그리고 번영을 위한 수단이지만, 우리나라 학생들의 당면한 과제로는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수단 혹은 진급하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바꿔 말하면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살고 있다는 얘기다.
원리와 기본이 없는 교육은 암기 위주의 목적이 되어 버린다. 기성세대가 요구하는 학습의 수준 역시 단답형 혹은 선택형으로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런 교육은 어떤 공부를 하면 어떻게 되고, 어떤 암기를 하면 어떻게 된다는 답을 알고 시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익히 보아온 유형이 아닌 특이한 문제에 부딪치면 당황하면서 오답을 찾을 수도 있는 현실에 처하고 만다.
이런 문제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환경이 변하면 새로운 것에 대한 적응이 따라야 하지만 지금까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아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려움이 밀려오며, 변화와 혁신을 거부하는 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불어오는 변화를 맞으면 이를 받아들이기보다는 회피하게 되며, 맞불을 놓아 모면하려고 하기까지 한다.
이것은 자칫 자신만을 위하는 혹은 개인주의에 빠지게 되는 현상을 초래하며, 변화를 남의 일처럼 여겨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모든 사람들은 나 아니면 모두 적이 되고 만다. 죽으면 같이 죽고 살면 나 혼자 산다는 것이나, 내가 못 먹을 것이면 개나 준다는 말이 상통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며칠 전에 본 영화‘변호인’처럼 누군가가 나서서 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힘든 일은 내가 하지 않고 누군가가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조금 편향되게 해석하면, 나는 단답형 객관식을 외울 테니 너는 문장으로 된 주관식 문제를 풀라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면서 이 영화를 통하여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주인공이 되어 내 뜻대로 행동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내 의견과 같은 내용을 어필해주는 것이라면 속이 시원해지는 것이다. 비록 얻어맞고 피투성이가 되었어도, 할 말은 하고 싶다는 돈키호테가 있어 속이 후련한 것과 같은 이치다. 이런 영화를 보면서 대리만족이라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아직까지 이 나라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이 틀림없다. 내가 하기 싫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개인주의 혹은 이기주의는 아니더라도 나를 중심으로 하는 편향된 사고로 점철된 현실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안들에 대하여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사회의 모든 병폐를 객관식이냐 주관식이냐 하는 문제에서 파생되었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무슨 문제를 풀면 그에 따라 다음에 따라올 문제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할 줄 아는 국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면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 최소한 문제를 다 풀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엉뚱한 답으로 생사람을 잡는 그런 문제풀이는 하지 않을 것도 확신한다.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사형을 집행한 다음 30년 뒤에 미안하다고 말하는 과오는 범하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 말하자면 상식이 통하는 사회 혹은 누구나가 예상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며, 그런 것은 바로 백년지대계인 교육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물론 현재의 제도를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더라도 말이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하였다. 지금 당장 어떤 효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혹은 백년이 지나는 동안 나타나는 것으로, 후세에 길이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교육을 그냥 산수문제 하나는 푸는 것으로 해결할 수는 없지 않는가. 최소한 산수에서의 1 더하기 1과 사회에서의 1 더하기 1이라는 문제의 답이 서로 다른 것쯤은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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