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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땅 전라북도

꿈꾸는 세상살이 2014. 9. 15. 21:54

침묵의 땅 전라북도

사람들은 말한다. 전라북도는 사람들이 유순하고, 양반이며, 마음이 넉넉하다고. 그러나 혹자는 말한다. 전라북도 사람들은 배알도 없고, 표리가 부동하다고.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면 그 어느 것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똑 같은 전라북도 사람을 두고도 각자 말하는 사람의 보는 시각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진정한 전라북도 사람들의 심성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위에 나온 말들을 모두 합한, 예를 들면 온순하며, 급하지 않고, 이웃을 배려할 줄 알고, 문화를 알며, 그러나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격은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먼 옛날 원삼국시대부터 비옥한 토지와 원만한 경사지를 바탕으로, 백제와 후백제에 이르기까지 살기 좋은 고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전국 3대 도시 중의 하나가 있었을 정도로 넉넉한 물산과 후한 인심으로 더불어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문화와 예술에 대한 감각 또한 뛰어났으며, 나와 너를 구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베푸는 생활을 하였다. 아사달과 아비지가 적국이나 다름없는 신라에 가서 석탑과 목탑을 세우고 기술을 전수해준 것이나, 왜에게 여러 제도를 비롯하여 불상을 전해 준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이렇게 베풀고 사는 사람들이 어찌하여 배알도 없다거나 표리가 부동하다는 말을 듣는 것일까. 그것은 전라북도 사람들에게 처한 사회적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으며, 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해석한 왜곡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번 6.4지방선거에서 나타난 결과를 보아도 그런 것을 알 수 있다. 정치적 입장에서는 적이라고 여기던 새누리당이나 무소속에서 얻은 표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경상도에서도 이런 현상이 있었지만, 그 곳은 막상막하의 경쟁구도에서 빚어낸 것이기에 약간 다른 면이 있다. 이때 전라남도에서 얻은 새누리당의 표를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이러니 전라북도 사람들은 배알이 없다는 소리를 듣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러면, 이런 배알도 없다는 소리는 왜 나와야 했던가. 이유를 설명하자면 길어지겠지만 이 역시 전라북도 사람들의 유순하고 남과 더불어 사는 즉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합당한 일에는 넉넉한 대한다는 성격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위와 같은 성격을 한 군데 모아 놓으면, 바로 강점기의 식량 수탈용 농장이 있었던 곳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때도 전라북도 사람들이 마냥 굽실거리며 빌붙어 살아왔던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분연이 일어설 때와 앉을 때를 가렸으며,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도 지켜야 할 것은 지키는 애국심이 투철한 사람들이었다. 1919년 삼일운동 당시 익산 주현동에서는 일본인 농장 대문 앞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켜 죽음으로 항거한 것이 그런 증거이다. 또한 우리는 논개와 같은 의인을 배출하였는데, 이는 조선 중기의 혁신가 정여립의 봉기와 녹두장군 전봉준의 혁명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보아야 한다. 동학은 글자 그대로 태양의 정기를 받는 동쪽의 학문으로 새로운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은 동학을 두고 프랑스 혁명과 중국의 천안문 혁신과 같은 위치에 놓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의 안위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친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의인이며 애국자라고 한다. 전라북도는 이런 곳이다.

근래에 와서도 이런 얼은 이어지고 있다. 남원 출신의 김주열 학생이 마산에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나, 1980년 5월의 봄에 전주 신흥고의 전국 유일의 고등학생 의거를 포함하여 전북대 이세종 열사까지 모두가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한 페이지다.

그러면 이렇게 훌륭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왜 표리가 부동하다는 말을 듣는 것일까. 그 대답은 간단하다. 한마디로 사람이 유순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참고 참으며 남을 배려하지만, 어느 순간에 참을 수 없어 폭발하게 되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혹자는 서울로 서울로 보따리를 들고 나섰다가 적응하지 못하여 배신한 것이라고도 하지만, 이 역시 홀홀 객지에서 부당한 대우를 당하면서도 참고 참다가 마지막에 분개한 것이 그만 낙인으로 돌아온 것에 불과하다. 설움과 모진 고통을 참고 견디며 돌아온 환향녀에게 화냥년이라는 낙인이 찍힌 것과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전라북도 사람들의 심성이 고운 것은 자타가 인정하는 바와 같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잘 활용할 것인가 하는 것만이 숙제로 남는다. 교육 방법 중에 화를 내지 않고 감정을 상하지 않게 자신의 부당함을 표현하라는 말이 있다. 이제 우리 전라북도 사람들도 싫고 좋은 것을 재대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무엇이든지 차면 기울고 넘치는 것이니 그 조화가 필요한 것이다.

20140702 새전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