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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사랑 효 콘서트를 보고 1

꿈꾸는 세상살이 2014. 9. 15. 21:57

익산사랑 효 콘서트를 보고 1

2014년 7월 18일 오후 7시 30분, 배산체육공원 특설무대에서 펼쳐진 제6회 익산사랑 효 콘서트를 방청하였다. 언제부터 홍보를 하였는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행사장 주변의 거리는 온통 차량으로 넘쳐났다. 많은 교통경찰이 나와서 통제하며 보행을 안전하게 안내하였다. 나도 어렵사리 길가에 차를 대고 행사장으로 들어서니 아직 시작하기 전이었다. 조금은 망설였으나 맨 앞줄이 비어 있어 자리를 잡았는데, 잠시 후 한복도 아닌 양복으로 말쑥하게 차려입은 사람이 오더니 자리를 비켜주면 좋겠다고 하였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그냥 다른 말은 하지 않으면서 자리를 뒤로 이동해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구구히 물어보지 않아도 내용을 모를리야 없지만, 시민이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아 관람을 하겠다는데 굳이 자리를 비워 달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준비하는 측에서는 귀빈 즉 말하자면 귀하신 분들이 앉아야 한다는 논리였을 것이다. 그러면 귀하신 분이 누구인지 왜 자리를 비워놓아야 하는지 파악하여 사전에 합당한 준비를 해야 맞는 일이지, 시민이 의자에 앉은 다음에 자리를 비워달라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의 내 성격대로라면 그가 누구며, 왜 시간도 지키지 못하고 늦게 오는 사람이 귀한 사람이냐고 따질 것이지만, 나보다 나이도 좀 더 먹어 보이는 사람이 양복을 잘 차려입었는데 비를 맞으며 준비한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성의가 있어서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효 콘서트인데 효를 받아야 할 사람이 주인이고 귀빈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귀빈이라는 말인지 따지고 싶었으나, 행사장 분위기를 생각하여 세 번째 줄에 옮겨 앉았다. 겉만 본다면 백발이 성성한 내가 효 콘서트의 주인 되는 대상이 아니면 누가 그 자리를 채워야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는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렇게 귀하신 귀빈이 오지 않았고, 다른 시민들이 앉아서 관람하였다. 혹자는 그냥 처음부터 비워놓고 앉는 것이 상식이지 그런 것을 따지는 놈이 무식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 하나 하나를 따지지 못하는 시민이 올바른 시민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며, 무너져가는 사회 현상에서 특권의식을 어떻게 뿌리 뽑을 수 있을 것인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특권의식이 지나치면 공공보다 내가 우선하는 개인주의로 발전하게 되며, 그들에게는 시민이나 국민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평소에도 귀빈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시작한 후에 온다거나 올지 안 올지도 모르면서 자리를 비워놓고 이빨 빠진 것처럼 만드는 것에 대해서 아주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심하면 그런 사람들은 귀빈이 아니라, 귀하게 대하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모든 면에서 빈약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정말 귀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시간도 귀한 것을 알며, 하물며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일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 전에도 이런 일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어떤 행사에서 귀빈이라고 소개하는데, 행사의 주인은 전혀 소개를 하지 않으면서 시의원이네 혹은 도의원이네 국회의원이네 하면서 얼굴을 보이러 온 사람들을 귀빈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잘못 되었다는 말이다. 당연히 행사를 위해 수고한 사람들을 칭찬하면서 사기를 북돋아 주어야 다음에 더 잘할 것인데, 쓸데없이 눈도장 찍으러 온 사람을 보면서 귀하신 시민들이 박수를 보내면서 기분 맞춰줘야 맞는가 말이다.

경찰이 민중의 지팡이라면, 공무원이 지역 주민의 공복이라면, 의원이 국민의 심부름꾼이라면 역시 주인은 국민이며, 귀빈은 시민인 것이다. 그들이 자칭 선거철에 하던 말도 시민의 심부름꾼이 되고 종이 되겠다고 큰 절을 하지 않았던가. 헌법에서도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였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게다가 이번 행사에서는 안내장에 축사를 하기로 되어 있는 4명이 모두 참석하지 않은 이변도 있었다.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다. 처음부터 무슨 일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할 수도 있고, 참석하려 하였으나 다급한 일이 생겨 참석하지 못할 경우도 발생한다. 심지어 개인적인 심정으로 참석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핑계를 대는 경우까지 발생한다. 이것은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문제는 축사야 어차피 인쇄물로 나타나 있으니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축사가 짧을수록 혹은 없으면 없을수록 좋아하는 것이 상례라면 변명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일부러 급한 용무가 생겨서 참석하지 못하니 죄송하다고 전해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성숙한 시민들은 그런 말을 들리는 대로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만 그 사람을 생각해서 그렇게 믿고 싶어 할 뿐이다.

이날의 행사 안내장을 보니 여러 곳에서 후원을 하였는데, 행사장 무대 양쪽에 세워진 안내 플랑카드에는 무려 38개의 협조자 명단이 들어있었다. 정말 대단한 행사였던 것은 확실하다. 내가 공식행사를 하려하면 단 몇 곳의 후원을 얻기도 힘들어 우왕좌왕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렇게 많이 참여를 하였다니 정말 시민 전체가 즐길만한 대단한 행사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시민이 그리고 많은 단체나 기업이 효 콘서트라는 하나의 명제를 놓고 이렇게 뭉치는 것은 좋은 현상일 것이다. 익산사람들이 이렇게 단결할 수 있다는 것도 좋은 일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