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산문, 수필, 칼럼

서문 밖 기념비

꿈꾸는 세상살이 2014. 12. 4. 21:03

서문 밖 기념비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향의 주택을 선호하고 있다. 이는 우리 선조 대부터 남쪽 방향의 집이 갖는 기능을 높이 사두고 있다는 해석이 된다. 그런 남향집은 대체로 뒤에는 산이나 언덕이 있어 바람막이가 되고, 앞쪽에는 탁 트인 곳이나 낮은 논밭이 대부분인 것을 연상하게 된다. 동으로는 어둠을 밝혀주는 햇살이 들어올 만큼의 여유 공간이 있고, 남쪽은 겨울에 볕이 깊게 들고 여름에는 그늘을 주는 주거환경을 선호해왔다. 반면 서쪽에는 산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으며, 대체로 어두운 인상을 가지고 있다.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가면 해미읍성이 있다. 이성은 1983년 1월 21일에 사적 제116호로 지정되었는데, 조선 성종 22년인 1491년에 완성되었고 둘레 1,800m, 높이 5m, 넓이가 6만여 평이나 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성곽의 일부가 무너지고 성안에는 민가와 관공서가 들어서기도 했으나, 1973년부터 복원되기 시작하여 지금의 제 모습을 찾았다.

가족들과 함께 성 밟기를 하면 길이도 짧지 않아 적잖은 운동도 되며, 그 긴 시간동안 이런저런 얘기도 할 수 있어 가벼운 나들이 장소로 아주 좋은 곳이다. 어떤 아낙들은 머리에 모자를 쓰고 그 위에 수건을 둘러 한 점의 태양도 거부하면서 열심히 뛰는 모습은 건강한 삶을 보여주기도 한다. 육체적 건강을 생각하면서 운동을 하고,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기 위하여 방문하니 일석이조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거기다가 역사적 사회적인 공부도 되며 현재의 사회상과 비교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 참 좋은 곳이라고 생각됐다.

이러한 성은 해미면의 큰길가에 있어서, 지나는 손들이 성의 모습을 보고 언제든지 자동차를 멈출 수 있는 그러한 친숙한 곳이다. 누구나 쉽게 드나드는 또 하나의 이유는 문은 있으나 항상 열려있고, 문 앞 광장은 잔디밭으로 아이들도 부담 없이 뛰어놀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추운 겨울날에도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어서 빨리 오라고 손짓하며 반기고 있으니 정이 가는 곳이요, 웅크리고 들어가도 반겨줄 불씨하나 없는 성이지만 길 가던 이 누구라도 기꺼이 들어가는 곳이다.

아마 햇살이 따사로운 봄날 휴일에는 해미읍성의 성벽을 덮어 겨울바람을 막아주던 담쟁이 넝쿨의 이파리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몰릴 것이다. 그러면 성이 가진 여러 가지 볼거리가 한층 더 인기를 끌 것이다. 전국의 작은 고을 읍성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대표적인 석성으로 이 성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거기에 더하여 해미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지고 돌아갈 것 또한 확실하다. 나의 경우에도 그러했으며, 시원한 초가을에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은 정도로 아쉬움이 남는 곳이다.

이 순신 장군이 35세 때 약 10개월간 근무했던 곳으로 이것만으로도 역사적 가치가 충분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거기에 반하여 읍성 주변의 편의시설은 부족하다. 가장 넓은 면적을 요구하는 주차장은 정해 진 곳이 없어, 좁은 2차선 도로의 양쪽에 눈치를 보아가며 불법주차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해미읍성에 대한 좋은 인상을 흐리게 하는 한 요인이 될까 염려된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해미면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찾아보았다. 미처 다 둘러보지 못한 것은 없는지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거기에서 역사적인 연대가 잘못 기록되어 있는 곳이 눈에 띄었다. 약간 망설이다가 해미면사무소에 연락을 하였더니 답신이 왔는데 만족할 만하였다. 어느 공무원들은 그냥 못들은 체하는 경우도 있는데, 당시의 해미면 직원은 자신들의 홈페이지가 잘못되어 있음을 확인하였으며, 같은 마을 주민도 아닌데 일부러 지적을 해준 것에 대해 고맙다는 말까지 하였다. 틀린 곳은 즉시 수정하겠다는 내용을 덧붙여서 말이다.

이 정도 되면 틀린 곳을 찾아서 지적해 주는 것도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점만 가지고 있는 해미읍성은 아니다.

이 성 역시 동문, 서문, 남문을 두고 있는데 주 통로는 남문이고, 동문과 서문은 필요시 특정일에만 여닫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북쪽에도 문이 없는 것은 아니나 문의 규모나 주변 인공장애물을 볼진데, 아마도 전투시 병사들의 출입이나 긴급한 상황에서만 사용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이 중에서 서쪽을 보면 문밖에 천주교 신자의 순교기념탑이 있다. 성안에는 큰 호야나무가 있고 옆에는 감옥터도 있다. 당시 재판을 받은 죄인을 가둬두던 곳이다. 그런데 이 호야나무에는 어렸을 적에 철사 줄에 묶였던 나이테 같은 둥근 흔적이 있다. 이 나뭇가지에 사람의 머리채를 철사로 묶어 처형한 곳이라 한다. 아마도 변형된 교수형이라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좀 더 처참하게 보여 다른 사람들에게 겁을 줄 수 있을까 고심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대다수 처형자는 천주교 신자였으며, 이 성 안팎에서만 당시 100여 년 개화기 역사에 2천여 명이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현재 이 성의 상공에서 2천여 혼객들이 울부짖고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금새 비라도 내릴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하늘은 아직도 푸르고 맑기만 하다. 2천여 혼객이 문제가 아니라 더 많은 수의 영혼이라도 이들이 여기에 더 이상 머물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자신들의 억울함을 후세의 자손들에게 해꼬지할 조상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에 관한 문제로는 순교를 당하는 것을 가장 크고 귀중한 행동으로 내세운다. 그만큼 인간으로서 행동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반증이다. 그래서 이러한 행동은 인간이 아닌, 거의 신과 동격으로 까지 추앙받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이다. 그때의 신자들은 성안에서 인간의 심판을 받고, 서문 밖 처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종교적으로 마지막 시험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가는 도중 종교의 상징인 물품을 밟고 지나가도록 강요당했고. 만약 이를 거부할시 그 사람은 바로 자신이 밟고 있는 그 돌다리에 내팽개치는 죽임을 당했다. 물론 밟고 지나간 성도 역시 구덩이나 우물에 빠트려 죽이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종교적 양심적인 면에서 크나 큰 시련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서있는 서문 밖 순교기념비가,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의 마음속으로 그때 일을 소상히 다 전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가 발생했던 곳이고, 지금도 그것을 기리는 순례자가 한 해에 수 만 명씩 이어지고 있으니 종교적 문화적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왜 서문에서만 이러한 일이 있었으며, 동문과 남문은 유사한 기념탑이 없는 것일까. 대체적으로 동이나 남문에서는 어느 성을 막론하고 유사한 기록이 없다. 그만큼 우리는 동쪽을 귀히 여기고 남쪽을 아끼며 사랑해 왔던 것이다. 대문을 열면 찬바람이 덮쳐오고, 은세계가 오랫동안 남아 있는 곳은 서쪽이나 북쪽인데, 이것만으로도 북문이나 서문을 꼭꼭 닫게 하는 한 요인이다.

우리 역사상 근대의 억압기에 서울의 서대문형무소는 강제와 참혹의 대명사였다. 우리의 독립 운동가들은 누구나 한두 번 거치면서 고초를 당하고 죽어갔던 곳이다. 서울의 서소문 역시 재판과 처형의 의미에서 해미성의 서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시대 서울의 북쪽대문도 숙정문이라는 이름으로 존재는 하였으나, 이곳 역시 사람의 왕래를 목적으로 했던 문이 아니라, 행사나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만 간헐적으로 사용했던 문이다.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이렇게 북쪽과 서쪽을 꺼려하고 멀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진다. 그러나 딱히 정해서 발표한 정부의 공식 문서는 없다. 또 누군가 그렇게 하자고 얘기한 흔적도 없다. 서쪽에 대한 인식은 여러 해 동안을 거치면서 민간의 습관에 따라 자연스레 인식되어온 내용이 아닌가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해 뜨는 동쪽을 바라보면서 아침기지개를 켜고, 그렇게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 한줌의 풀이라도 더 베어 땔거리도 만들고 퇴비도 만들었을 것이다. 동녘에서 훤히 밝아오는 햇빛은 관솔기름이나 유채기름을 아끼는 중요한 자원이 되고, 동창은 거기에 맞춘 반드시 있어야 할 수단이었을 것이다.

이에 비하면 서쪽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루 종일 들에 나가 일하던 농부는 해가 지고 어두워진 다음에, 더 이상 사물을 분별하기 어려운 정도가 되어서야 돌아오는 고달픈 생활이었을 것이다. 이른바 이름도 생소한 서창은 필요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지는 해가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서쪽은 그런 아쉬움과 원망의 방향인 것이다. 이렇게 민중의 삶에서 뿌리내린 풍습은 그대로 나라의 문화로 번졌을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지금의 대부분 집들도 동쪽에 방을 내지만 서쪽이나 북쪽에는 부엌이나 화장실 등을 두는 것도 전례의 습관이라 본다.

그러나 최근에는 주택을 짓는 경우 이러한 서쪽에 방을 두거나 창을 내어, 밝게 비쳐지도록 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유로는 가상학에서 보는 서쪽은 습성상 습기가 많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건조한 것들을 배치하는 것이 그와 중화작용을 하므로, 그 집에 거주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더 좋다는 것이다. 이 이유가 맞든지 틀리든지 간에 어쨓튼 지금까지 우리가 서쪽을 기울어져 가는 곳, 습하고 어두운 곳, 춥고 귀신이 사는 곳 등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내용을 반증해주는 것이리라.

깨끗하고 신성한 동쪽을 더럽히기보다는, 일상의 삶을 거역하는 사형은 어둡고 습한 서쪽에서 집행하던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동서향을 가릴 이유가 없는 세상이니 이제부터라도 서쪽도 밝은 곳, 좋은 곳, 희망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들을 가졌으면 좋겠다.

특히 요즈음 생활은 동서남북의 방향에 따라 행동이 달라질 이유도 없고, 해가 뜨거나 지거나 상관없이 밤낮으로 하루의 생활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소외 받았던 서쪽에서 더 많은 발전이 기대되고, 현재까지의 것에다가 서쪽의 이익을 더한다면 아주 완벽한 조화가 될 것이다.

전에는 박해받고, 터부시했던 곳을 단장하여 깨끗하고 편리하게 꾸밀 필요가 있다. 여러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게 하고, 찾기 쉽게 만들어야 할 의무도 있다. 그래야 서쪽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다른 동쪽이나 남쪽과 비교하여 조금도 부족한 게 없고, 아쉬운 곳이 아닌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일상의 삶 속에서 항상 같이하고, 오히려 꼭 필요한 한 부분인 것을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해미읍성 서문 밖에 초라하게 서있는데다 지금도 찾는 이가 없고, 찾기도 쉽지 않은 수줍은 기념탑으로 남아있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다. 인근에는 탑을 알리는 이정표도 없고, 성 외곽 한 쪽 변두리에 버려진 모습으로만 자리하고 있는 것이 그 탑을 바라보는 내내 슬펐다.

가보고 싶은 곳, 국민으로서 꼭 가봐야 할 곳, 후손으로서 반드시 간직해야 할 곳들이 서쪽에 더 많이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서문을 넓히고, 그 대문은 항상 열려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모든 입장객은 서문을 통하여 드나들고, 서문의 의미를 시작의 장소, 창조의 장소로 부각시켜주면 좋겠다. 그렇다면 비록 어두운 과거일지라도 현재에는 산 교훈으로 다가 올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문화 창조는 과거 역사로부터 나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입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다. 서문도 우리 것이다. 서쪽도 우리의 역사만큼이나 긴 고통을 같이 견뎌온 삶이다. 서쪽도 좋은 곳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내 것들 > 산문, 수필,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훈도 바뀌어야 한다.  (0) 2014.12.04
고향길  (0) 2014.12.04
2013년 11월 8일 화요일  (0) 2014.12.04
일그러진 김치  (0) 2014.12.04
몇 살 먹었우?  (0) 2014.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