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의 인연을 끊으려 한다.
3월 초순의 뒷산은 찾는 이가 없었다. 아직 명절 끝이라고는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대보름날을 그 축에 세우지도 않는다. 이제 대보름이 3대 명절이라는 것은, 알면 좋고 몰라도 그만인 그냥 지나가는 세시풍속의 하나가 되었다. 기온은 올랐지만 산에는 아직 누런빛 일색이다. 명절도 지나고 한식이 아직 먼 이맘때쯤의 묘역은 인기척이 뚝 끊긴 그야말로 적막강산 그대로였다. 여느 때처럼 들꽃의 신비함을 찾는 것도 아니고, 푸르름이 있어 심신을 달래주는 것도 아닌, 아직은 뒤안에 숨은 계절임이 분명하다.
때 아닌 춘삼월에 눈이 내리더니 온통 천지가 하얗다. 그냥 잠시 잠깐 어쩌나보려는 눈이 아니었다. 녹은 물은 겨우내 가물어 말라비틀어진 잔디를 적셔 주었다. 이는 필시 봄 불을 막아보자는 자연의 계획이 아니었을까. 이렇듯 나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것이 자연이라면 내가 너무 무딘 탓일까.
혼자서 산을 오르는 발걸음이 더디기만 하다. 어느새 신발에 흙이 묻기 시작한다. 오늘 이 산을 오르면 언제 다시 오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산이다. 때가 되면 아이들을 거느리고 오르던 길이었는데 오늘은 혼자다. 형제도 없이 이렇게 걷는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려니 생각하니 내 뒤가 보인다. 딱 한 번, 내일모레 파묘를 하는 날 다시 찾아오고 나면 그다음은 기약이 없다. 머나 먼 이역도 아니건만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차가워진다. 순간 다리의 근육은 뻣뻣해지고 머리도 쭈뼛해진다. 내가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서도 할아버지께서는 나에게 무엇을 주셨을까 생각해본다.
할아버지의 묘는 산 높은 곳에 있다. 선영하에 모시지 않았는데 평소 당신께서 말씀하시던 곳에 분묘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곳은 자그만 산의 팔부능선쯤 되는 곳으로, 반대편 산봉우리를 바라보는 시원한 곳이다. 그것은 벌써 나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다. 그런 나에게 이 산의 높은 곳에 위치한 묘는 할아버지 묘라는 것 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애틋한 정도 없다. 사랑스러운 마음도 없다. 남들처럼 응석을 부리거나 같이 지내본 기억도 없다.
내가 이러할진대 아래의 후손들은 어떠할까. 시골까지 오고 가느라 복잡하고 불편한 가운데에서도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질 수는 있을까. 귀한 시간 빼앗겼다고 행여 불평이나 하는 것은 아닐까 염려된다.
나는 이제 할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기로 작정을 하였다. 저 높은 곳을 바라다보겠다던 마지막 소원마저 외면하고 개장을 하기로 한 것이다. 할아버지가 나에게 해 주신 것이 하나도 없기에 야속해서가 아니라, 내가 할아버지의 얼굴조차 몰라 남과 같아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일년에 몇 번 안 되는 성묫길에 고인의 명복을 비는 것조차 힘들고 귀찮아서가 아니다. 어차피 우리 대에서 끊어질 풍습이라면, 확실하게 우리 대에 끊고 가자는 것이다.
그들에게 어떤 것을 바라는 무엇보다, 거기 계시는 분을 위하여 나는 개장을 선택하였다. 오늘 당장 누구를 위한 것이냐 보다는 나중까지 누구를 위한 것이냐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결론이다.
돌아오는 길도 역시 처량하다. 오늘은 아무리 큰 소리를 내어도 들어 줄 사람이 없다. 마치 미래의 내 길인 듯 하다. 수도 없이 다니던 길이지만 이름도 성도 없는 기계에게 맡겨본다. 그리고는 정해진 대로 따라간다. 내 인생도 이렇듯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이나, 자연에 의해 연출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나는 지금 나와 연결된 것으로부터 연을 끊으려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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