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리지 않기 위하여
지난 연말에 보험을 하나 들었다. 얼마 전부터 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뚜렷한 상품정보가 없어서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늦게 결정하였다. 그러나 낯모르는 인터넷에서마저 주민번호를 적어라,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라 하면서 여러 가지로 번거롭게 하였다. 나는 궁금한 내용만 적어주고, 거기에 맞게 대답하면 소비자가 선택한 상품으로 직접 상담을 하는 방식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아는 사람의 소개를 받았으나 까다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선 예상 설계를 하는데도 주민번호나 전화번호를 묻는 것은 기본이고, 그게 없으면 프로그램 설계가 안 된다고 하였다. 아직은 방문을 원하지 않으니 그냥 궁금한 것에 대답만 해 달라고 하여도 막무가내다. 만나서 자세히 설명해야만 알 수 있다고, 무조건 만나보자고 한다. 보험은 어째서 꼭 만나고, 직접 설명을 들어야 하는 어려운 상품들만 있는지 모르겠다.
그냥 보아서 한 눈에 알 수 있고, 선택하기 쉽게 설명해 놓은 보험안내서는 왜 없는지 궁금증을 더해준다. 추측건대 이렇게 함으로서 만나고, 그래야 고객을 한 명이라도 더 건질 수 있다는 전략인 듯도 하다. 그러면 소비자는 이미 상품을 구매하는 손님이 아니라 벌써 미끼에 걸린 잉어나 붕어에 불과 한 것이다.
평상시 잘 알고 지내는 보험 설계사들을 피하고, 그냥 한두 번 만난 적이 있었던 사람을 소개받았다. 그러면 보험을 들지 않았을 때 덜 미안할 것 같았다. 그러나 된 통 걸리고 말았다. 그 사람은 연말 목표량에 미달되었고, 마감 3일전 초읽기에 들어선 상태였었다. 그래서 우리는 넝쿨째 굴러온 호박에 비유되고 있었다.
찾아오지 말라는 데도 굳이 방문을 하더니 도대체 돌아갈 생각을 안 한다. 장황한 설명만 하고 있으니 다른 일로 외출할 시간계획을 짤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멋지게 상품을 하나 팔고 돌아갔다. 자그마치 35년간이나 납입하여야하는 원대한 보험이었다. 가입자와 피보험자인 아이를 불러 동시에 서명을 하였고, 마감을 걱정하고 계실 소장님께 보고한 후 보내 준다며 청약서 원본과 부본 모두를 가지고 갔다.
그 후 보름이 되기 전에 보험을 해약하였다. 물론 보험의 해약은 제도상 완벽보장을 하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온갖 회유와 설득이 뒤따른다. 특히 연말 마감을 깨뜨리는 해약은 더 더욱 난처하다. 그때까지 청약서 부본도 받지 못했을 뿐더러, 35년간이라는 기간도 부담스러웠고, 그 기간에 비하여 납입보험료도 만만치 않아 내린 결론이었다. 우리는 그 원인이 연말 실적에 쫒긴 판매에 있다고 생각한다. 고객의 요구사항을 잘 듣고 거기에 부응하는 상품을 소개하는 것보다, 자신의 목표량을 염두에 둔 영업의 결과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 사람은 즉시 해약이 발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지역본부의 출석 교육을 받았다. 비꼬아 말하면 반성문 교육이다. 사전 고지나 충분한 안내가 부족한 그야말로 순간강매에 의한 규정위반으로 풀이한 것이다. 그런 제도에는 나도 공감한다. 일반경쟁을 하는 사기업은 실적에 의한 보상은 확실하며, 미달에 의한 책임 또한 냉정하다. 계속하여 부족하면 그만 두라는 말을 한다. 따라서 잘리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공격적이 된다. 그런 과정에 소비자보다는 내가 급하고, 고객보다는 호박이 그리운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우리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한순간 흐린 판단으로 남에게 35년간 부담을 지워서야 쓰겠는가. 비록 내가 잘린다 해도 중용을 지키고 나의 위치를 잊지 않는 자세는 필요할 것이다.
2007. 0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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