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아는데 엄마만 모르는 사실
휴일이면 전화요금이 공짜라며 자랑하던 녀석이 전화가 없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으랴마는 휴일요금 정액제로 선불을 내고는 공짜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 후 며칠은 휴일마다 전화가 오더니 이제는 건너뛰는 날이 더 많았다. 행여 당직이라도 서는 것인지, 아니면 훈련이라도 있는 것인지 몰라 전화를 걸 생각은 못했다. 그러다가 임무수행에 방해가 되면 행여 밉보일까봐 두려워서였다.
아무리 그래도 토요일까지 전화오기를 기다리지는 않는다. 다만 일요일이나 공휴일이라도 전화가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부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용한 공휴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차마 전화를 걸지는 못하고 조심조심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시간되면 엄마한테 전화 좀 해라. 엄마가 걱정하고 있다.”
점심시간도 지났고 전국노래자랑도 끝이 났다. 그리고 얼마를 있다가 전화가 왔는데, 어제는 당직이었고 오늘 문자 메시지를 받았을 때는 잠을 잤다고 하였다. 대대 내에 장교가 몇 명 되지도 않는데 휴일에는 반드시 장교가 당직을 서야하니 자주 있는 일이었다.
거기다가 내일은 동계훈련을 떠나야하니 오후에 짐을 챙기고 준비하느라 바쁘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더니 내일부터는 추워진다는데 왜 하필 추울 때 훈련이냐고 성화를 댄다. 곁에 있어서 다 들어 알고 있건만 녹화방송 후에는 불똥이 나에게 튄다. 이럴 때면 동계훈련에 대한 정확한 답변이 궁해질 수밖에 없다.
내가 군 복무를 하던 곳은 행정구역상 강원도 춘성군이었는데 지금은 춘천시와 통합시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겨울철 동계훈련은 강원도 화천군으로 나가곤 하였었다. 다시 말하면 춘성군과 화천군의 접경 위수지역 관리부대였던 것이다. 당시 공병이었던 우리는 봄부터 가을까지 부대 막사나 복지시설을 확충하는 공사를 하였고, 동절기에는 모자란 훈련을 모아서 집중하여 실시하였었다. 이른바 혹한기 주둔지 근무로 부르는 이 훈련은 글자 그대로 가장 추운 시기를 골라 야외에서 천막을 치고 숙영하는 것 자체가 훈련이었다.
주둔지 근무는 허허벌판에서 지형지물을 이용한 후 바람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땅을 파고 천막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마치 움집이나 고인돌과 같은 천막에서 먹고 자며, 주간에는 훈련을 하고 야간에는 보초를 서는 것이 주둔지 근무였던 것이다. 이때쯤이면 장교들은 주둔지 근무 교안을 만드느라고 정신없이 바쁜 시기가 된다.
영하 20도를 밑도는 추위 속에서 소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자기 몸에 총을 대고 묶어 두었던 병사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혹독한 조건에서도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순찰에 적발되는 것이 바로 훈련이었다.
천막이 땅위로 올라와 드러나지 않도록 낮게 파는 것도 기술이지만, 7~9명이 생활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도 기술이었다. 먹고 밥 짓는 물은 보급을 받지만, 씻고 세탁하는 물은 자체조달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기에 눈과 얼음을 녹여서 만든 물을 사용하는 것은 게으르고 동작이 굼뜬 사람이 당하는 또 하나의 훈련이었다.
내일이면 동계훈련을 떠난다고 한다. 보병들의 동계훈련이면 이만저만한 준비가 아니다. 먹고 자는 것부터 생활하고 훈련하는 것 모두를 옮겨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맨 손으로 들고 날라야하는 고역이 따른다. 군장을 꾸리고 빠진 것이 있는지 점검도 해야 한다. 만약 부족한 것이 있어도 현지조달이나 추가 보급이 어려울 것이니 그것 또한 낭패다. 아들은 의약행정을 전공하고도 합리적인 보직을 받지 못한 채 보병이 되었던 것이다. 훈련이나 행군, 매복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서운한 마음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우리나라 군인의 모든 임무를 도맡아 짊어진 것처럼 행동하는 보병이 된 것이다.
우리 군대동기들은 올해 3월4일로 임관 30주년을 맞아 행사를 준비 중이다. 우리는 당시 모든 전투가 공병의 폭파로부터 시작되고, 공병의 철수가 바로 전쟁 중 후퇴라는 생각으로 행동했었다. 따라서 폭파와 지뢰 등 장애물에 관한 물품, 부교나 조립교 등 무거운 부재들과 그것을 운반하는 많은 차량과 장비가 동원되는 게 현실이었다. 어떻게 보면 마치 부대 이동이나 되는 양 충분한 차량 덕분에 공용품은 물론이며, 개인 병기를 제외한 신임병의 모든 군장까지도 차량으로 운반하였던 기억이 난다.
사람의 입김으로 천막 안을 덥혀야 하며, 불을 때는 연료가 얼어서 밥을 짓지 못하던 것이 동계훈련이건만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보병으로서 중대장도 개인 군장을 메고 행군을 하며, 주간에는 훈련도 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해 줄 수도 없다. 가만히 내버려 두었으면 의무병으로 가서 전공 관련경험이나 쌓을 것을 괜히 장교를 지원해서 생고생을 시킨다고 나무랄 것이니 이럴 때는 모르는 게 약이다.
계속하여 진행사항을 연락받고 있지만 올해 행사에는 참석하지 못할 것 같다. 아들이 제대한 얼마 후까지도 혹여 말을 아껴야 할 일이다. 어서 빨리 통일이 되고 남북간 대치가 없어져야 할 것을 주문해본다. 정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틀림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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