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산문, 수필, 칼럼

독서와 서재

꿈꾸는 세상살이 2014. 12. 4. 21:17

독서와 서재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육체적으로 편안해지면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소망도 늘어난다. 그 중의 하나가 창가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는 것이며, 고개를 들어 밖을 보면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감상하는 풍요로움도 포함된다. 마당 끝에 서있는 나무에서 떨어지는 단풍잎 소리에 놀라 화들짝 잠을 깬 멍멍이가 두리번거리는 오후의 풍경이라면 더욱 정겨울 것이다. 이때쯤이면 울밑의 봉선화 보퉁이가 톡톡 터지면서 이리저리 튕겨져 나가는 모습도 시간가는 줄 모르게 한다.

잘 가꿔진 잔디밭을 징검다리로 건너 토방에 올라서면 추녀에 옥수수가 매달려있고, 줄줄이 꿰어 걸쳐놓은 감도 운치를 더해준다. 빨랫줄에는 올여름에 부화한 새끼를 포함하여 다섯 마리의 제비가 줄을 맞춰 날개를 입질하고 있다. 마당의 평상에는 따가운 햇볕에 마른 고추가 이제는 검붉은 색을 띠었다.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평안해지고 세상 근심이 사라지는 풍경이다.

어릴 적 꿈이 과학자가 아니었던 사람이 없지마는, 커서는 그 때의 꿈과 상관없이 누구라도 한 번쯤 가져볼만한 소망이다. 그런데 거실에 들어가 보면 어떨까.

눈에 잘 띄는 거실 벽에는 커다란 가족사진이 걸쳐있는데 마치 내가 주인이라는 듯 방문객을 감시하며, 그 밑으로는 모든 상황을 전부 녹화하고 기록하겠다는 블랙홀이 시커멓고 커다란 텔레비전 속에 숨어있다. 반대쪽에는 둥근 원통 모양의 진열장에 이름 모를 양주병이 가득하다. 창밖 눈 아래로 펼쳐진 풍광은 전망대에 올라선 느낌을 준다. 서늘한 곳 북향으로는 잘 정돈된 그릇이 반짝반짝 눈부신 자태를 뽐내고, 식탁 위의 하얀 그릇에 담긴 시커먼 블랙베리 송이는 조화를 넘어 보는 이를 유혹한다. 그런데 방안에 들어 가보면 어떨까.

우아한 더블 퀸 사이즈의 황토침대가 방 중앙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양쪽으로 교통정리를 하고, 한 쪽에 있는 화장대에는 이름도 생소한 화장품들이 그 생김세도 제각각인 채 자태를 뽐내고 있다. 벽에 붙은 문을 열면 형형색색 가득 찬 옷들이 꽃밭을 이루고, 다른 문을 열어보니 간단한 세면실이 나타난다. 구경하는 집에서 보았던 매우 낯익은 모습이다. 어느 집을 가보아도 어느 문을 열어보아도 거기서 거기다.

위에서 말한 차 한 잔 마실 마음의 여유와 한 권의 책을 읽을 공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인 세상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하던데, 내 꿈은 정녕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일까.

아무리 둘러보아도 책을 어디 쌓아놓고 볼 진열장도, 한 몸 푸근하게 쉴 공간도 없다. 아이들이 학교 다닐 때 보았던 책들도 색이 누렇게 변했다고 버린 지 오래다. 그렇다면 내가 보았던 책이야 물어 더 무엇 할 것인가.

올해 한 갑에 2,500원 하는 담배를 2015년 내년에는 4,500원으로 인상하겠다는 뉴스가 나왔다. 애연가들은 태연한 척 애써 참으며 그것도 감수하겠으니 인상된 금액은 전부 흡연자들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아우성이다. 일견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들이 내뿜는 담배 연기로 인하여 원하지 않는 간접흡연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 세상이다. 나는 담뱃갑 인상으로 늘어난 세금을 모두 간접흡연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사용하여야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정녕 내가 생각하는 이상과 꿈은 현실로 다가올 수 없는 것일까.

독서의 계절! 이 가을에 나에게도 잘 갖추어진 서재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곳에는 아주 오래 된 책을 비롯하여 새로 나온 책들까지 한 가득 쌓여있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읽어야겠다고 생각은 하였지만 아직 읽지 못한 책들도 짬을 내어 읽을 수 있도록 거기 그렇게 놓아둘 수 있다면 좋겠다. 나에게 필요한 책이 얼마나 될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이 얼마나 될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서재는 좀 컸으면 좋겠다. 읽다가 못 다 읽으면 잠시 접어두었다가 다시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읽다가 싫증이 나면 잠시 밀쳐놓고 다른 책을 집어들 수 있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만들어진 서재는 내가 죽은 뒤에 자식들이 사용하면 될 것이고, 만약 그들이 책을 싫어한다면 동네 사랑방으로 활용해도 좋겠다. 아무나 와서 읽고 또 빌려갔다가 다시 가져오는 그런 책방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서재는 밖으로 난 문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밖으로 난 문은 작은도서관의 현관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이중으로 만들면 좋을 것이다. 허준이 지은『동의보감』은 색이 누렇게 바래면 더 좋아하면서, 내가 보았던 책은 멀쩡한 데도 왜 버렸는지 모르겠다.

김득신은 『사기』에 나오는『백이전』을 1억1만3천 번 읽었다고 하는데, 당시 숫자 개념을 현재로 환산하면 11만 3,000번이 된다. 이때의『백이전』은 한글로 번역하니 5쪽이 되어 김득신이 읽은 쪽수는 모두 565,000쪽에 해당한다. 요즘 300쪽의 책으로 환산하면 1,883권이 되는 분량이다. 당시 김득신은 유생으로, 생업에 관계없이 책만 읽었다면 하루 3권 즉 900쪽은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체적으로는 628일 동안을 읽어야 하며, 어림잡아도 1년 9개월은 걸렸을 시간이다. 쉽게 말하면 1년 동안 1,000권 독서에 해당된다.

지금 익산시립도서관에서는 6개월에 85권을 읽는 독서마라톤을 실시하고 있으며, 위탁경영 중인 마동도서관에서는 이와 별도로 1년에 52권을 읽자는 O2독서운동을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참하여 노력중이며, 이제 막 중반을 넘어선 지금 나는 일찌감치 초과달성한 상태다. 그러나 나에게는 내가 본 책을 꽂아둘 서재가 없다. 내가 비록 김득신보다야 덜 읽었다고 하더라도 나에게도 이것저것 눈치 안 볼 정도의 아담한 서재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책 욕심이 많은 내가 남에게 책을 줄 수는 없다하더라도, 여러 사람이 보고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 서재에는 한 줄의 글 읽는 재미와 차 한 잔의 여유가 배어있으면 더욱 좋겠다.

2014.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