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세배 새 세배
우리 풍습에 따르면 설날이 되면 어른들께 세배를 드린다. 세배는 새해를 맞아 덕담을 나누기도 하고, 축원을 표현하기도 하는 관례다. 이때 세배를 드리는 당사자는 자신의 포부를 밝히고 결심을 하기도 하는데, 이것을 들은 사람들은 그 계획을 달성할 수 있도록 조언도 하고 지원하는 장이 되기도 한다.
설이 되면 며칠 전부터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빨래도 하며, 이곳저곳을 찾아 정리정돈을 한다. 이는 새로운 해를 아무런 대책도 없이 맞는 것은 준비성이 없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마음으로부터 연유한다. 이때 겉으로 들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고 행동도 조신하게 하며, 부정한 행동을 금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그런 곳에 가지도 않는 근신으로 준비하였다.
설날은 새해의 첫날이며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조상들의 새해를 맞는 각오는 대단하여 다가오는 새날이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집안 모든 곳에 불을 밝히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어둠은 곧 음의 기운을 불러들이는 것으로 부정한 것에 속한다. 따라서 각각의 방은 물론이고 곳간과 마루, 부엌, 장독대와 화장실까지도 불을 밝혀 어둠을 물리쳤다. 다시 말하면 새날 맞이하기를 ‘지킴이’라는 이름답게 지극정성으로 하였던 것이다.
또한 새해 새날의 시작은 풍성한 먹거리를 통하여 환영하고 축하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러한 음식 준비는 전날 저녁부터 첫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남정네들은 음식 만드는 일에 관여하지 않으니 특별히 바쁠 일도 없었지만, 아낙들은 새로운 해의 음식을 준비하는데 꼬박 밤을 세는 것이 다반사였다. 무슨 일이든지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즐기라는 것처럼, 이것을 ‘세찬’이라 하는 별도의 이름을 붙이고 하나의 행사로 삼아 위로하여왔다.
여인들이 세찬을 준비하는 동안 어린 아이들에게는 일손을 돕는 심부름도 시키고, 음식을 장만하는 것을 교육도 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이때 생각 끝에 짜낸 묘안이 섣달 그믐날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핑계였을 것이다. 세찬을 만드는 동안 도란도란 웃음꽃도 피지만, 고초당초보다 더 맵다는 시집살이 얘기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어갔을 법하다. 그러다가 떡을 찌던 쌀가루를 묻혀 곤히 자는 아이의 눈썹에 흰 칠을 하는 놀이를 만들어 낸 것은 하나의 즐거운 발견이었으리라.
남정네는 새날이 오기 전에 세찬을 챙겨 사당에 예를 올리고, 어른들께는 지난 한 해에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렸다. 이것은 새로움에 대한 맞이가 아니라, 지나감에 대한 배웅의 의미를 가진 세배였다. 우리는 이것을 묵은 세배라 불렀다.
섣달 그믐날은 세찬의 준비며, 묵은 세배를 드리는 등 아주 분주한 하루에 속했다. 또 이날은 단 하루 남은 밤을 없애면 새해 새날이 온다는 의미로 ‘제야’라 부르기도 하고, 하루 저녁만 지나가면 첫날이 온다는 의미로 ‘제석’이라고도 불렀다. 그날 이후로 제야의 종소리는 계속하여 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여러 풍속을 모아 세시풍속이라고 부른다. 마치 묵은 것은 보내고 새로운 것은 어서 오라는 ‘송구영신’과도 같은 의미다. 새해 첫날 새로 엮은 복조리를 거는데, 나쁜 액귀는 복조리의 틈새로 모두 빠져 나가고 좋은 복만 들어오기를 고대하였다. 새로운 조리에 돈이나 쌀엿을 넣었는데, 이는 일상에서 쓰고 먹는 것처럼 중요한 것만 들어오라는 축원이 담겨있었다. 또 물에 불어 대나무 조리가 망가지거나 훼손되면 문지방에 걸었던 바로 이 복조리를 사용하였으니 유비무환의 준비성을 엿볼 수도 있었다.
묵은 세배, 새 세배, 세찬 등은 지금은 비록 사용하지 않는 말들이지만, 따지고 보면 조상의 슬기가 담겨있는 단어들이다. 바로 우리들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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