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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장수는 바닷가에 산다.

꿈꾸는 세상살이 2014. 12. 4. 21:36

소금장수는 바닷가에 산다.

우리민족은 음식을 만드는데 소금을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우리가 가장 즐겨먹는 반찬 중에 배추김치나 무김치를 보더라도 많은 양의 소금이 들어간다. 우리는 무 배추 등 재료를 깨끗이 씻은 후 소금물에 담가서 순을 죽인다.

우리 주변에 있는 식물들은 살아있는 동안 많은 수분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식물들로부터 에너지를 얻으려면 필요 이상의 많은 수분을 흡수해야 하는 부담감을 주기도 한다. 또 이렇게 수분이 많으면 부피가 크고 무거우며 상하기 쉬운 조건을 제공한다. 그러나 소금물에 순을 죽이면 자연 현상에 의해 식물의 수분이 빠져나가게 되어 우리가 먹을 때 부담을 줄여주기도 한다.

식물이 소금을 만나면 이렇게 부드러워지면서 부피가 줄어들게 되는데 우리는 이것을 간을 절인다고 한다. 또는 줄여서 간한다고도 한다. 같은 식물이라 하더라도 잎채소를 장기간 보관하여야 하는 음식일 경우에는 적절한 보관방법인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을 건채소로 먹을 경우에는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소금의 섭취량이 많은 축에 들어간다.

성경에도 있듯이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다른 것으로 짠맛을 낼 수가 없다. 이런 소금이 너무 짜면 쓴맛이 나는데, 이정도가 되면 음식물이 부패하지 못하도록 하는 구실도 겸하게 된다.

우리 집에는 작년에도 굵은 소금을 사 두지 않았다. 그래서 올해에는 천일염 굵은 소금을 한 포대 사두어야 할 것 같다. 주변의 어떤 사람들은 해마다 한 포대씩 사가는 사람도 있다. 도시에서 많은 양의 김치도 담지 않을 텐데 어떻게 그 많은 양의 소금을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국산 천일염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소금을 그렇게 많이 먹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소금은 서늘한 곳에 보관하면서 자체 보유한 수분을 빼내면 빼낸 만큼 질 좋은 소금이 된다하니 그럴만한 이유가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요즈음은 뭐든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소금 장사를 하기도 한다. 그것도 공장을 차린다거나 대규모 도매업을 하니 신기하기도 하다. 물론 어떤 것을 잘 모른다고 장사를 해서도 안 되고, 사업을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좋은 핑계거리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가끔 뉴스에서 만날 수 있다. 바다와는 거리가 먼 산골 깊은 곳에서도 소금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어느 작가의 말처럼 산골마을에서는 소금을 뿌린 듯 하얀 메밀꽃이 마치 소금밭과 염포를 연상시킨다는 말이 있기는 하다. 혹시 천지개벽이 되어 옛날에 소금밭이었던 곳에서만 하얀 메밀꽃이 핀다면 이 메밀꽃의 전생은 소금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 메밀꽃을 모아 말리면 질 좋은 소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메밀밭이 아닌 다른 산 속의 소금공장에서 계속하여 트럭으로 출고되니, 우리나라는 머지않아 소금 수출국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알고 보니 국내산 천일염이거나, 공장에서 화학적인 방법으로 만든 제조 소금이 아니라 모두 수입한 원래부터 소금으로 있던 것들을 담아 파는 실정이었다. 내용을 물어보니 한꺼번에 수입된 소금을 작은 포대에 옮겨 담아야 하는데, 수입산 소금이라고 적혀있는 포대에 담아야 할 것을, 잘못해서 국내산 천일염이라는 씌어져 있는 포대를 사다가 담았다는 것이다.

넓은 염전은 펑펑 나가 놀고 있는데, 길 좁은 산속에서는 별도로 공장을 지어 놓고 소금을 생산하는 일이 이해가 안 간다. 이제는 생산비도 건지지 못한다고 버려진 염전을 골프장으로 개발 중인 곳마저 생겨났다.

바닷물이 소금으로 되기까지에는 보통 15번의 공정을 거친다. 물론 소금물을 햇볕에 말려 수분을 증발시키면서 소금 알갱이가 생성되는 과정이다. 이것은 담아놓은 바닷물을 하루에 한번 씩 옆에 있는 염판으로 이동시켜 조금씩 결정체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국산 소금은 짜기는 하지만 빛깔이 희며 손으로 으깨면 그래도 쉽게 부서지는 편이다. 그러나 수입산 소금은 손으로 비벼보아도 쉽사리 깨지지 않는다. 오히려 손이 아플 정도이다. 수입산 소금이 그만큼 단단하게 말라있다고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바꿔 말하면 소금의 입자 결정이 반 친화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금은 원래 공기 중의 습기를 흡수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단단히 말라있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색 또한 우리 것보다 흐리며 지저분한 느낌을 준다.

앞에서 보았듯이 소금장수는 염전에서 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소금장수는 바닷가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많은 소금장수들이 육지로 가고 도회지로 떠났다. 이제는 소금 만드는 일 외의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고 염판을 뒤로한 채 떠났다. 우리는 떠나는 소금장수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먹거리가 적당히 짜서 간을 절일 수도 있는 정도의 소금이 필요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국산 천일염을 만드는 사람들이 없어지니 국산 소금도 그 만큼 없어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소금이 그 짠맛을 잃는 것은 고사하고 아예 그 짠맛을 낼 소금이 없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짠맛대신 쓴맛의 소금으로 간을 절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우리사회는 다시 국산 소금이 필요한 때이며 잎채소를 절일 소금이 필요한 때이다.

그래서 소금장수는 바닷가에 살아야한다. 바닷가는 갯바위 낚시터나 회를 파는 가게만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넓은 염전의 한 쪽 염판에서, 바닷물을 직접 다스리는 곳에서 살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우리 소금은 국적불명이 되며, 나아가 모든 맛의 근원인 소금을 우리의 짠맛으로 잘못알고 먹었던 우리 모두가 국적불명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소금장수는 소금밭에서 살아야 한다. 소금장수가 인건비도 못 건지는 염전에서 염판과 소금창고를 드나들며 고난의 눈물을 흘릴 때, 소금이 자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여 봉사한다는 것을 배워야한다. 자신의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 아닌 다른 물질들이 상하지 않도록 해주며 너무 강하면 약간 부드럽게도 해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가 살아야 할 곳, 내가 일 하여야 할 곳, 내가 행하여야 할 것들 모두를 가르쳐 주는 소금이며, 이를 다스리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소금장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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