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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지방 최초의 교회

꿈꾸는 세상살이 2014. 12. 4. 21:50

익산지방 최초의 교회

2013년 6월 14일 금요일, 어제 오후에 교회를 다녀왔다.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는 익산시 창인동에 있는 예수교장로회 소속의 이리남중교회이며, 어제 방문한 교회는 익산시 오산면에 있는 기독교장로회 소속의 남전교회였다. 어떻게 보면 둘은 가까우면서도 어떻게 보면 상당한 거리가 있는 처지라 할 것이다. 예장의 이리남중교회는 금요일에는 권찰모임을 가지지만, 나는 권찰도 아니어서 권찰모임에 대신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다른 교회를 방문한 것은 멈출 수 없는 나의 마음이 이끌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지난주에는 문화재단에서 익산을 소개하는 글을 써 달라고 하여 글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을 소개하자면 익산에 있는 종교에 관한 것으로, 다른 종교에게 혹은 일반 시민들에게 종교적인 차원에서 알려줄 만한 곳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다 알다시피 익산에는 여러 종교의 기념할 만한 순례지가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익산시 신용동에 있는 원불교는 전 세계 원불교의 총 본산으로, 이것이 바로 원불교의 성지이며 순례지가 되고 있다. 또 금마에 가면 국보 제11호 미륵사지석탑이 있고 그 곳이 바로 사적지 미륵사지인데, 백제시대에 무왕과 선화공주가 절을 지었다는 미륵사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 역시 국가에서 세운 불교계를 총 지휘하는 최고의 중앙 사찰이었으며, 석탑을 분해․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기에 의하면 탑을 세운 날짜와 그 때 비용을 댄 사람의 이름까지 확인되었다. 이것은 현재까지 발견된 불교계의 가장 중요한 기록이면서 예술적으로도 완벽한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 소개되었다. 이와 함께 왕궁리오층석탑, 왕이 다녔던 사찰로 지어졌던 제석사가 있었던 곳 등이 유명한 방문코스로 선정되어 있다.

한편, 용안면에 있는 화산천주교회 즉 나바위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이 첫발을 디딘 곳으로 유명하며, 신앙을 지키다 숨진 순교지를 포함하여 조용한 곳에서 정진할 수 있도록 피정의 집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이런 곳들이 바로 종교의 순례지이면서 각각의 종교가 추천하는 가볼만 한 곳으로 선정되어 있다.

물론 기독교 역시 이런 명소가 있다. 성당면 두동리에 가면 1922년에 세운 두동교회가 있는데 그 건물은 개화기에 지어진 것으로 당시 사회상에 의하여 남녀가 서로 마주 볼 수 없는 구조의 예배당으로 남아있다. 이런 예배당은 전북 김제의 금산교회와 함께 우리나라에 두 개밖에 없는 초기 기독교 유물로 기록되어 있다.

익산시에서도 이런 사항을 고려하여 익산의 4색종교 4색명소라는 제목을 달고 홍보하고 있다. 기독교와 천주교, 불교와 원불교의 4대 종교가 한 도시에서 서로 겨룰만한 가치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것들이 바로 전국의 대표 명소로 꼽힐만하다는 이유에서 부추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익산의 4색종교에 대하여 신기한 눈빛을 보낸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이런 말 자체가 그리 달갑지는 않다. 그러나 일반적인 대중의 시각에서 볼 때는 흥미롭고 비교해볼만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나도 남들에게 말할 때는 4색종교에 대하여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른 곳은 많은 명소를 소개하는데 유독 기독교는 달랑 두동교회건물 하나를 소개하는 가에 대해서는 서운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내가 찾아 나선 것이 바로 기독교와 익산지방의 3․1운동관련 자료였었다.

익산에 일어났던 삼일운동을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3월 1일의 운동이 아니었으며, 지방에 있어 소식이 늦었던 탓에 4월 4일의 4․4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때는 문용기, 김병수, 박영문, 장경춘, 박공업, 박학규 등이 주축이 되었으며, 김만순, 정진영, 오덕근, 박병렬 등도 가세하였다. 물론 이들 외에도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노력한 많은 애국지사들이 있었지만, 선봉에 섰던 이들이 바로 기독교계에서 나온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나는 두동교회 외에도 이런 점을 기독교계의 자랑으로 추천하고 싶었으며, 이들을 내가 직접 찾아가보고 싶었었다. 그래서 당시 운동의 발상지였던 남전교회를 방문하였고, 그들의 희생을 기리는 기념탑에도 가보았다. 그런가하면 일부 순교자들의 묘비로 찾아가는 것은 물론 그들이 적을 두었던 교회들도 방문하여 보았다.

이렇게 하는 것이 기독교인인 나로서 기독교에 대한 일반적인 사항을 시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알려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내용을 확인해나가는 과정에서 각 명소마다 최소한 두 번 이상의 방문을 하였다. 문용기열사가 소속되어있던 남전교회가 그랬고, 박병열열사가 있었던 서두교회가 그랬으며, 오덕근장로가 있었던 교현교회, 문용기열사의 기념비가 있는 오산면사무소와 생가, 초대 이리부윤을 지낸 김병수가 운영하였던 병원자리, 그리고 기독교가 익산에 처음 들어온 것을 소개하기 위하여 함라에 있는 함라교회까지 찾아갔었다. 시기적으로 보면 함라교회는 1900년도에, 1901년의 동련교회와 남전교회, 1903년의 서두교회, 1904년의 무형교회, 1906년의 웅포교회와 고현교회, 대붕암교회, 송산교회 등이 설립되었다.

그런데 남전교회는 1897년에 세워졌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는 교회를 관리하는 정식 기록에 의한 날짜와 처음 예배를 보기 시작한 날짜가 서로 다른 것에서 비롯된 차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지금은 여러 사항을 고려하여 1897년에 세운 것으로 본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새로 고쳐 쓰는 내용들은 모두 그렇게 따라가고 있는 추세다.

그런데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역사적인 내용보다도, 내가 왜 평일 오후에 남전교회를 방문하였느냐 하는 점이다. 그것은 목숨을 걸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희생한 열사가 있는 곳, 그런 곳의 모태가 되었던 기독교를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익산시에서 사진대회를 하더라도 4색종교가 소재가 되기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여러 경로를 통하여 찍은 사진들이 서로 내로라하면서 뽐내기 일쑤다. 그러나 유독 기독교 유적지로는 달랑 두동교회 한 곳만, 그것도 좌우로 굽은 건물을 잘 표현하려면 이렇게 찍어야 한다며 항상 비뚤어진 각도에서 사진을 담아내던 일들이 내내 서운하였던 것이다.

아무도 없는 평일 오후의 남전교회는 자물쇠를 굳게 채워놓기는 하였지만 내가 방문한 목적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나는 사진을 찍어 많은 시민들에게 보여주면서, 이것이 바로 익산에 처음 설립된 교회라는 점을 소개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 당시의 건물은 없어졌지만 그렇다는 사실만은 인정해 달라고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몸이 많이 피곤하여 쉬고 싶었지만 책자가 인쇄에 들어가기 전에 첨부사진을 제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일으켜 세웠던 것이다. 잔뜩 찌푸린 날씨에 간간이 안개비가 내리는 날, 우산을 받기도 그렇고 안 받기고 그런 날 오후의 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나로서는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우려를 몰아내는 순간이었으며, 적은 소임을 해낸 것 같은 마음이 나를 들뜨게 하였다. 정말 나는 남보다 나은 게 없는 초라한 모습이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음에 감사를 드렸다. 2013.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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