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유자청
시골길을 가다보면 길가에 노점상이 있는 것을 본다. 인구가 많은 도시도 아니고 교통량이 많은 교차로도 아니건만 진을 치고 있는 경우를 만난다.
거기에는 지역별로 자랑할 수 있는 특산물도 있고, 아니면 아예 지역성이 전혀 없는 값싼 공산품을 파는 경우도 있다. 나도 여기저기를 다니다보면 가끔 만나는 현상이다.
어느 날은 남도 지방에 볼 일이 있어 장거리 출장을 갔었다. 산천경개 좋고 물도 좋고 산도 좋았다. 거기다가 사람 인심까지 좋았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상당수가 농부들이었는데 대체로 욕심은 있어도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어떤 때는 욕심을 내지 않아도 될 것에 무리할 만큼 승부를 거는 것도 보았다. 이른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는 말처럼... 그만큼 때가 묻지 않았던 탓도 있을 것이다.
일을 마치고 이야기를 하다가 유자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겨울에도 따뜻한 지역에서 지을 수 있는 고소득 작목 중 하나였다. 그 해는 유자 풍년이 들어 값이 많이 내려갔는데 이익이 없다고도 하였다. 그런 말을 듣고 크게는 도와주지 못해도 성의 표시는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유자를 조금이라도 팔라고 하였다. 물론 값이야 시중보다 훨씬 비싸다. 경매 시장에 내는 가격을 잘 아는 농부들은 그 값에 항상 불만을 품고 아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터이다. 그러니 뜨내기로 하나씩 파는 물건은 자신이 매긴 값으로 경매장에 내는 것보다 훨씬 비싸게 파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골 길가의 노점상에서 나타나는 경제논리다.
길가의 노점상은 기껏 팔아보아야 하루에 얼마를 팔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지 어쩌면 농부의 하루 품삯과 물건 값을 계산하여 받으려는 듯 대도시보다 비싸다. 정말 대도시의 경매시장은 산지 각처에서 모여드는 곳이기 때문에 당연히 값이 내려가는데, 다만 거기에 중간이득을 붙이는 수준으로 보인다. 그러니 큰 재래시장에 간다거나 공판장에서 바로 받아온 판매장에 가면 생산자들이 추천하는 가격보다 싸게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우리 동네 재래시장에서 구입할 때보다 훨씬 비싼 값의 유자를 골랐다. 그러나 산지의 직접생산 농가는 길가 노점상과 또 다른 면이 있었다. 농부는 주머니를 열고 돈을 지불하여 사온 제품 외에 자신의 노동력을 감안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나에게도 그런 경우였다. 유자를 흥정할 때는 경매시장에 물건을 내는 농가의 심정으로 시중 값보다 비싸게 결정했으나, 나는 안다는 체면에 비싸다고 말도 못한 채 미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바가지를 씌우는 것처럼 욕심이 많아 보이던 농부는 나의 마음을 알았다는 듯 그것을 덤으로 상쇄시켜주었다. 말하자면 한 상자 값에 두 상자를 받은 셈이다.
결국 나는 시중 값보다 조금 싸게 사면서 신선하면서도 품질이 우수한 특등 상품을 산 것이다.
둥글둥글하면서도 모나지 않고 균일하며 색깔도 윤택이 나는 좋은 상품을 싸게 사고, 정성들여 씻어서 유자청을 만들었다. 집에 있던 유리병을 모두 꺼내보았으나 크기는 물론 제각각이지만 수량마저 부족하여 어쩔 수 없이 시장에 가서 새로 사왔다. 유리병에 차곡차곡 담으면서 보기 좋은 유자청은 감기 예방에도 효과가 탁월하기를 바랐다. 정성들인 유자청은 맛도 좋기를 바랐다. 한 숟가락 한 숟가락 뜨면서 이것은 누구를 주고 이것은 누구를 줄 것이라고 들뜬 마음으로 담았다. 내가 아는 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유자를 골랐고, 거기다가 내가 정성을 들였으니 아주 최상의 명품 유자청이 될 것은 분명하였다.
혹시나 농약이 묻어있을지 몰라 씻고 또 씻고 유난을 떨었다. 도마에 놓고 주방 칼로 자르는 데는 단단한 유자가 만만치 않아 손목이 시고 어깨가 저려올 정도였다. 어디서 백설탕보다 흑설탕이 좋다는 말을 들어서 보기에는 좀 깨끗하지 못하더라도 흑설탕을 넣었다. 만들 수만 있다면 내가 담은 유리병에 ‘사랑과 정성으로 만든 가족표 유자청’이라는 멋있는 상표를 붙여주고 싶었다.
병병이 담긴 유자청을 조심스레 차에 실었다. 서로 부딪치면 깨질까 걱정되어 사이사이에 신문지를 말아 간격을 두었다. 멀리 떨어진 일가친척들에게 나누어줄 생각을 하니 차가 출발하기도 전에 벌써 그들이 좋아할 모습이 떠올랐다.
1: 올 겨울 감기 걸리지 말고 잘 지내라고 유자청을 가져왔습니다. 하나씩 가져다가 드시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2 : 그래요? 고맙습니다.
3 : 잘 먹겠습니다. 다음에 또 주세요…
1 : 남도 생산농가에서 좋은 것만 골라 직접 만들었습니다.
4 : 두 병 가져가면 안돼요?
5 : 올해 유자가 풍년이라 아주 싸던데… 나는 필요 없어요. 이 병 정도면 몇 개 안 가져도 될 텐데 내가 좋은 걸로 사다 담으면 되니까…
하긴 유자가 풍년이니 값이 싼 것은 당연하고, 잘게 썰어서 만들었으니 질 좋은 상품인지 찌그러지고 못난 것을 썰었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시장에서 팔다가팔다가 남아서 폐기처분의 직전에 떨이로 사왔는지, 생산 농가 현장에서 직접 골라 비싸게 사왔는지 분간할 수도 없었다. 거기다가 설탕으로 흠뻑 덮어 재워 놓았으니 …
다음에는 유자를 고르고 사는 장면부터, 씻고 만드는 모든 내용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같이 보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설정이고 편집했다고 말하면 어쩌지? 나는 그럴 실력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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