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판 위의 고기 한 점
모임이 있는 날 불판에서 구워진 고기는 누구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사라진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고기 한 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구워지기가 무섭게 없어지던 것에 비하면 정말로 불가사의다.
할머니는 칠순이 되도록 쌀독의 열쇠를 쥐고 계셨다. 행여나 아까운 쌀을 낭비할까봐 밥을 할 양만큼만 정확히 되어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양은 정해진 식구가 먹기에는 항상 부족한 양이다. 원래 부족할 줄을 알면서 정량에서 일정 부분을 감하고 되어 주신 것이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밥을 푸실 때 한두 숟가락을 몰래 잡수실 수도 있다. 그러나 항상 시어머니 진지와 남편의 밥을 푼 다음에 자식들 밥을 푸셨다. 그러다가 밥이 남으면 자신의 밥그릇에 퍼 담았으며, 모자라거나 딱 맞았을 경우에는 밥을 잡숫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밥을 잡수실 때 항상 조금씩 남기는 버릇이 있다. 그 양을 헤아려보면 밥공기의 바닥이 덮일 정도인대 대략 1할 정도나 됨직하다. 늘 그렇게 잡수셔서 그런지 그게 정량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밥을 굶는 아내가 안쓰러워 밥을 남기기 시작하셨고, 어머니는 그런 밥을 부엌에서 혼자 잡수셨다. 어머니께서 그런 밥을 미처 못 드셨을 경우에는 여지없이 할머니의 눈에 띄었다. 그러면 할머니는 그 밥을 거두어 솥 속에 넣으셨다. 그리고 다음에 밥 지을 쌀에서 그만큼을 제하고 내 주셨다. 배가 고픈 어머니께서 잡수셨다고 하더라도 이미 할머니의 쌀 양에는 계산이 끝나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아무 말씀도 못하셨다. 충분히 먹고 남을 양을 대주지 못하는 죄책감이 만들어낸 습관이었다. 그리고는 다음에 밥을 남길 때에는 물을 말아놓으셨다. 물에 불은 밥은 오래 있다가 먹으면 먹기가 힘들기 때문에 바로 먹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래도 할머니의 계산법에는 변함이 없었다.
우리는 회식 자리에 가면 간만에 배불리 먹어보자고 말한다. 그것은 개인 지불이 아닌 공금인 경우에 더 심하다. 그리고는 정말로 배가 부를 때까지 먹는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고기 한 점은 서로 눈치를 보며 먹기를 꺼린다. 마지막은 내가 먹지 않았다는 구실을 만들기 위함이다.
혹자는 상대방이 먹도록 남겨두는 배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벌써 배가 부르도록 먹은 뒤이니 별도로 남에게 배려를 할 필요가 없는 상태이다. 따라서 마지막 남은 고기 한 점을 상대방이 먹도록 남겨두는 것은 이미 배려의 정신에서 위배된 뒤이다. 그렇게 남아서 버려지는 고기는 고기가 아니던가. 진정한 배려란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생각하여 먹고 싶어도 참고 억지로 남기는 밥이 배려인 것이다. 된 밥을 좋아하지만 억지로 물을 말아서 먹다가 남기는 것이 배려인 것이다.
할머니는 며느리를 생각하는 배려가 전혀 없는 야박한 사람이었던가.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절약을 가르치셨다. 비록 방법이 좋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며느리 역시 그런 절약 정신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곡간의 열쇠를 넘겨 받았을 때에는 쌀독에 쌀이 그득한 상태였다. 아버지는 더 이상 밥을 남기지 않으셔도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밥을 남기셨다. 아버지는 그 이상 더 잡수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경(詩經)에‘기포이덕(旣飽以德)’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아직 먹지 않았는데 덕으로 이미 배가 부르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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