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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장 안에는 아직도 닭이 남아있다

꿈꾸는 세상살이 2015. 5. 1. 05:48

닭장 안에는 아직도 닭이 남아있다

얼마 전 시골 고향에 다녀왔다. 매일 혹은 매주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간혹 가보는 고향이다. 그곳에는 아직도 살아계신 어르신이 계시고, 울타리 주변에는 감나무와 밤나무가 있어 가을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다. 울 밖 텃밭에는 굼뱅이돔부와 때늦은 오이 그리고 부추도 있다. 조금 일찍 심은 배추는 나물을 해 먹을 정도는 되었고, 열무는 통째로 삶아 시래기로 먹어도 좋을 계절이다.

늦은 봄에 입식한 병아리들이 언제 그런 시절이 있었느냐는 듯이 어느새 다 컸다. 이 닭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름날 보양식에 눈치를 보던 닭이다. 그러더니 입추에 처서까지 지나고부터는 누구 눈치를 볼 것도 없이 이제 마음 놓고 돌아다닌다. 지난여름에는 공장에서 잘 가공하여 파는 삼계탕용 포장 닭을 사다 먹느라고 눈길을 주지 않았던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가을이 한창일 때까지 삼계용 닭이 남아있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올 가을은 물론 눈 내리는 겨울에도 삼계탕용 닭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그 숫자가 많다.

삼계탕용 닭은 오랫동안 키운다고 해도 일반 닭처럼 덩치가 커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입식 시기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원래 덩치가 작은 종이라서 그런지 일반 닭들과 섞어 키우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느라고 제대로 크지도 못한다. 그래서 삼계용 닭은 다른 닭들과 분리하여 키우는 게 아는 사람만 아는 상식이 되어있다. 그래도 나이배기가 되면 살이 토실토실해지면서 쫄깃쫄깃 한 맛이 일반 닭보다 더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번에는 삼계탕용 닭을 세 마리 잡기로 하였다. 어쩌다 한 번씩 가는 고향길에서 조금은 욕심을 내본 숫자다. 가까운 곳에 사는 친척들이 많이 있어 가끔씩 들르는 나로서는 한꺼번에 이것저것 챙기지 않으면 내 차지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고향이기 때문이다.

내가 닭장에 들어가자마자 불청객에 놀란 닭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줄행랑을 친다. 어떤 닭은 날갯짓으로 흙먼지를 날려 시야를 흐리기도 한다. 마치 시위대가 연막탄에 눈을 못 뜨는 것과 비슷한 풍경이다. 닭은 기억력이 낮아 매일매일 모이를 주고 물을 주는 주인과도 친해지지 않는 습성이 있단다. 그런데 처음 보는 녀석이 왔으니 더욱 놀라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약한 동물로서 무조건 도망하고 보는 삶의 욕구 본능일지도 모른다.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닭들을 보면서 내 맘에 드는 닭을 골라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때는 눈에 보이는 대로 우선 잡고 보는 게 상책이다. 어느 닭이 큰지 가리다가는 자칫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수도 있는 때문이다. 마침 가까운 곳에서 땅에 둥지를 틀고 흙 목욕을 하던 닭이 눈에 들어왔다. 제법 통통한 것이 살집도 있어 보였다. 다른 닭들은 모두 달아난 지 오래 건만 웬 소란이냐며 눈만 멀뚱멀뚱 뜨고 쳐다보는 것이 마치 나를 놀리는 듯해보였다. 그러자 나는 반드시 너를 잡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발동하였다.

조심조심 다가가 손을 내미는 순간, 기 싸움에서 이미 진 것을 인정하였는지 아니면 슬금슬금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감지하였는지 날개를 퍼덕이며 달아나 버렸다. 그러나 금방까지 웅크리고 있던 닭은 도움닫기를 하지 못한 까닭에 멀리 날지 못했다. 겨우 서너 발 앞에 떨어진 닭이 또 다시 날갯짓을 하면서 뛰어갔다.

그런데 뛰는 닭의 모습이 조금은 이상하였다. 뒤뚱뒤뚱하는 것은 영락없는 다리를 다친 닭이었다. 자세히 보니 무릎이 뒤로 꺾이지 않고 앞으로 꺾인다. 사람으로 말하면 대형 고통사고라도 난 듯 보였다. 그러나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그대로 굳어버린 것이다. 원래는 뼈와 힘줄만 있어야 할 종아리에 굳은살이 박여 발바닥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면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긴 발바닥을 가진 닭이었을 것이다.

다리가 성치 못한 닭은 도망치면서도 다른 닭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도망치지 않고 나를 노려보던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늘 혼자였고, 그러다 보니 살이 쪄서 몸집이 커졌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커진 덩치는 운동을 할 수 없게 만들었고 아픈 다리를 더욱 못쓰게 만드는 악순환에 들었다.

조금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내 손에서 가장 가까운 닭은 바로 다리 다친 그 닭이다. 내가 손을 뻗어도 쉽게 도망도 가지 못한다. 아직 잡지도 않았지만 잘 삶아 놓으면 한참 뜯을 것도 있어 보이는 닭이다. 다른 사람들은 쫄깃쫄깃한 맛에 토종닭을 먹는 다고 하지만, 너무나 질기면 턱만 아플 뿐 사실 씹는 맛도 제대로 모르는 게 상식이다. 그래서 나는 내색은 안 했지만 조금 부드러운 맛을 좋아한다. 그순간 다리를 다친 닭은 운동량이 부족하여 조금은 덜 질길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것이다.

이제 손만 내밀면 맛있는 닭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 손은 내 생각과 달리 다른 닭을 향하고 있었다. 미처 발걸음을 돌릴 시간도 없이 웅크린 채로 옆에 있던 닭을 잡았다. 손과 발이 따로 놀았지만, 손은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다리 다친 큰 닭 대신 몸이 성한 그러나 작은 닭을 잡은 것이다. 작은 닭이 맛이 부드러울 것 같아서가 아니었다. 다친 닭이라서 기분이 안 좋은 선입견에 따라 내린 결론도 아니었다.

사람인 내가 보기에는 아픈 닭이나 성한 닭이나 먹을거리인 것은 매 한가지다. 병에 걸린 것도 아니니, 고기로 먹는 닭고기는 닭고기일 뿐이다. 그러나 다리를 다쳐 원하는 만큼 운동도 하지 못하는 신세였지만, 그래도 살고자 노력하는 의욕을 꺾기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다른 닭들과 과감히 맞서 경쟁을 하는 닭이 불쌍하면서도 당당해 보였다.

닭집에서는 기르는 닭을 잡아 팔기도 하지만 튀김으로 혹은 요리를 해서 팔기도 한다. 어떤 때에는 손님이 가져온 닭을 한 마리에 얼마씩 돈을 받고 잡아주기도 한다. 아파트에 사는 나 역시 생닭을 처리할 방법이 없었기에 시장으로 갔다. 닭집에서는 내가 가져간 닭을 보더니 잡는 비용을 안 받겠다고 하였다. 닭이 너무 작아서 잡아주는 비용을 지불하면 닭 값보다 배꼽이 더 커져 본전도 건지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통 큰 서비스를 한 것이다.

내가 다리 다친 닭을 잡아오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닭집 주인은 내 마음을 알아준 듯하였다. 혹자는 아픈 다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리를 다친 닭은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중이었고, 사람의 판단이 항상 닭의 판단에 비교하여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 사람도 그럴 것이다. 조금은 미숙하더라도, 조건은 미흡하더라도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아름다운 것이다. 어쩌다 실수를 하여 다른 사람에게 못 미치는 결과가 나왔을지라도,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노력 하였는가 정도는 인정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렇다고 결과를 뒤집거나 순서를 바꾸자는 얘기는 아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주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어떤 사안에 있어서 절대적인 평가에 이어 상대적인 평가도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이것은 마치 씨름 선수가 각기 같은 체급끼리 모여 겨루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201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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