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죽음은 어떻게 해석될 것인가
최근 들어 톨스토이의 작품인『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소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 소설은 노벨 생물학상 수상자인 ‘일리야 일리치 매치니코프’의 형인 법원 판사 ‘이반 일리치 메치니코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던 이반 일리치 메치니코프의 죽음은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애도보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경쟁구도로 이어진다. 우선 직장 동료들은 빈 자리가 생기면서 승진에 대한 경쟁과 업무 변화의 회오리에 휩싸이고, 아내는 남편이 죽음으로써 받을 연금에 대한 계산을 하며, 결혼을 앞둔 딸은 행여 결혼 자체에 문제가 생길까 근심한다. 그런가 하면 조문을 온 친구들은 오랜만에 만나 즐길 카드놀이에 신경을 쓴다.
1881년에 사망한 이반 일리치에 관한 이 책을 읽다보면 그래도 조금은 아니다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것 역시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에 조금도 지나치지 않음을 느낀다. 내가 간 조문에서 우리들은 카드나 화투놀이를 하였고, 떡을 먹고 술을 마시며,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앞으로 산 사람이 어떻게 살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였다.
또 죽은 사람이 남겨놓은 재산이 얼마이니 남은 가족은 그래도 살 수 있을 것이고, 보험에 들었던 것을 합하면 그래도 부족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겠다는 위안도 하였다. 혼기에 찬 자녀는 돌아가신 아버지는 그렇다 쳐도 이제 정신 바짝 차리고 잘 살아가라고 하였다. 이 소설의 내용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예전부터 우리는 상가에 가서 하룻밤을 지세며 유가족을 위로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때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하여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거나 화투를 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어떤 의도가 있거나 고인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그런 장례를 치르다보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고인을 애도하고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즉 고인을 기리는 행위가 없다는 것이다. 그가 죽기 전까지 어떻게 살아왔으며 정말로 자신보다 가족을 위하여 헌신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진정으로 알아주지 않는 것이다.
어떤 소년의 묘비에‘인생을 짧고 사랑은 길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가 살아온 시간은 짧았지만 그가 사랑한 것은 영원하고 많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자신보다 남을 위하여 헌신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죽으면서도 자식걱정과 아내 걱정을 하는데, 정작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 슬픔이다. 아내가 받을 연금이 많게 하기 위하여 혹은 아들이 취직을 못할까봐 걱정하며 일자리를 미리 부탁하는 그런 아버지를 몰라주는 것은 이율배반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왜 알아주지도 않는 희생을 해가며 노력해야 하는가.
아버지는 그가 행한 것에 대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그냥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자신보다 가족을 우선 생각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것이 바로 인문학적 사고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자기 가족에 국한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행동이 아닐 것이다. 그런 우선 가족 그리고 다음에 사회와 국가를 위한 인문학이라면 그것도 틀리지 않은 것이다.
논어에서도‘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 하였다. 우선 자기 자신 그리고 가족을 인문학의 범주에 올려놓는다면, 그 다음에 사회와 국가에 대한 이바지의 기회도 생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아버지 혹은 내 어머니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남은 가족들이 그냥 배불리 먹고 편하게 살아가기 위한 도구의 하나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그의 참 마음을 알아주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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