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과 사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진실과 사실 사이에서 살아간다. 두 단어는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확연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진실은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그것이 가지는 본질에 따른 것이며,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현상을 의미한다. 물론 사전적인 뜻을 따진다면 거짓 없이 바르고 참된 것과 객관적인 의미의 실제로 있는 일이라는 선으로 구분할 수는 있다.
진실은 형체가 있든 없든 시간에 상관하지 않으며, 사실은 자연계에서 벌어지고 있어 오감으로 느끼는 현상을 의미한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진실이며, 지구가 도는 것과 상관없이 파도가 치고 쓰나미가 몰려오는 것 자체는 사실인 것이다.
얼마 전 새벽 3시, 집에 든 도둑을 쫓는 과정에서 몸싸움이 일어났는데, 50대 도둑은 넘어졌고 20대 주인은 청소용 봉걸레대로 가격하였다. 그 결과 도둑은 뇌사상태에 빠지고 집주인은 징역 1년 6월을 실형을 받았다. 총기 사용을 허용하는 미국과 무한방어권이 있는 중국에서도 이런 판결이 나왔을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다. 집주인 청년이 봉걸레대로 때린 것도 도둑이 뇌사상태에 빠진 것도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과잉방어와 상관없이 야밤에 무단으로 주거를 침입하였으며 물건을 훔치려한 도둑이 원인제공을 하였다는 것이다.실제로 킥복싱이나 격투기 같은 스포츠에서도 상대가 넘어졌을 때 공격을 멈추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순전히 공격자 자신의 판단에 의해 결정할 문제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진실을 보아야 한다. 하나는 도둑이 먼저 무단으로 침입하였다는 것이며, 주인이 공격을 할 때 도둑이 바로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하였느냐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도둑과 집주인이 몸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로 도둑이 확실하게 항복하면서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느냐는 것이다.
일본 극우파는 위안부 사진을 들어 보이며, 이렇게 웃고 있는데 어떻게 강제 성노리개냐는 말을 한다. 그때의 위안부는 반항하고 싶어도 반항할 수가 없었으며 도망하고 싶어도 도망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 일이 죽기보다 싫었지만 죽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는 상황에서, 거부하고 반항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만약 그랬었다고 하더라도 일을 감해주는 것은 고사하고 돌아오는 것은 심한 고문뿐이었다. 이러한 진실은 덮어둔 채, 사진 속에 비친 웃음이라는 사실만 가지고 논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과오다.
그런데 이런 일은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일어나고 있다. 성폭행을 당한 여성이 얼마나 강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저항하였느냐는 기준을 두고 판결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때 역시 힘이 없어서 성폭행을 당했다는 진실은 외면하고, 얼마나 크게 소리 지르고 반항하였느냐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저항하는 여성도 주변의 상황을 보아가면서 소리를 지르거나 반항을 하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반항하는 것은 더욱 불리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는데, 살려달라는 고함소리의 데시벨을 측정하거나 뿌리치는 팔의 세기를 측정해가며 반항하라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사람들은 항상 벌어지고 있는 진실과 사실 사이에서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지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작은 사실이 큰 진실을 너무나 쉽게 덮어버리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자칫 정의와 불의가 뒤바뀔까 두려운 것이다. 이런 때에 진실을 알리는 언론이 더욱 절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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