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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사형수

꿈꾸는 세상살이 2015. 11. 14. 22:39

 

마지막 사형수

 

조성애, 김용제/ 형설라이프/ 2011.02.07/ 319쪽

 

조성애 :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간호학과를 졸업하고1955년 샬트르 성 바오로수녀원에 입회하였다. 명동 성모병원 간호사로 일하기도 하였으며, 인천의 박문여고 교사로도 근무하였다. 1977년 재소자들을 상대로 편지 상담을 시작으로 교도소 사목에 헌신하였고, 사형수들과 가해자 가족 그리고 피해자 가족들을 만나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가족이 거두지 않은 사형수들의 시신을 직접 거두기도 하였다.

 

 

김용제 : 충북 옥천출생으로 1991년 10월 19일 여의도광장 차량 질주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당시 21세 였던 청년은 1997년 12월 30일 사형을 집행하기까지 일기를 써서 조성애수녀를 통하여 편지를 보낸 내용이 책을 엮어졌다.

가족은 할아버지와 지병이 있는 할머니, 귀머거리에 벙어리인 아버지, 시력이 극히 나쁜 어머니, 간질병이 있는 큰형, 그리고 작은형과 동생이 있어 8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지병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가출하여 다른 남자와 살았고, 아버지는 그런 일로 인하여 술로 지내는 날이 많았다. 큰형은 서울로 가서 결혼도 하였지만 간질병이 도져서 이혼을 하게 되었고, 작은형은 서울에서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았다.

주인공인 김용제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였지만 그것은 그냥 이름뿐이고 사실은 시력이 나빠 칠판 글씨도 안 보이는 처지에서 그냥 왔다갔다만 한 학교였다. 그 후에 맹아학교에 다니기도 하였지만 역시 공부에 취미가 없었다. 성장하여서는 서울과 부산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취직도 하였으나 시력이 나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그 결과 바로 해고되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방랑과 방탕한 생활 그리고 자살까지 시도하게 되었고, 나름대로는 열심히 일한 직장에서 급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자 그것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무차별적 분풀이를 하게 되었다. 그것은 어느 특정인에 대한 특정한 사건이라기보다 자신이 겪은 지난날에 대한 보상심리이면서 사회에 대한 보복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오투독서모임의 지난달 독서토론 주제였다. 그러나 내 형편에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모두 사 볼 수 없는 상황이라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로 하였다. 그런데 내가 다니는 도서관에는 마침 이 책이 없었다. 새로 주문을 하더라도 그리 쉽게 결재가 나지 않고 설사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내가 이 책을 읽기까지는 더 오랜 기간이 걸릴 것이 확실했다.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인터넷에서 독서후기를 읽었다.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한두 편이 아니라 적어도 20편 이상의 독서후기를 읽어보았다. 그리고 독서모임의 토론장에 참석하였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날 참석한 독서 토론자들은 이 책을 읽지 못한 사람이 더 많았다. 아니 훨씬 더 많았었다.

나는 이 책에 대하여 주인공인 김용제가 우리나라 마지막 사형수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이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고 어떻게 보면 조금은 억울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마도 마지막 사형수라는 책이 나오지 않았나 생각되었다. 그런데 독서후기를 보면 주인공 김용제는 어릴 적부터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고, 커가면서도 사랑을 받지 못한 청소년으로 자라났다. 그래서 아마도 그의 인격 형성에 문제가 되었고,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에 장애가 있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 역시 그런 김용제에 대하여 조금은 동정심이 일었고, 사람은 처음부터 잘 길러야 한다는 생각에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말하자면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김용제는 그런 환경이었기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 같은데,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얼마든지 더 많이 있으며, 또한 다 김용제처럼 행동하지는 않는 다는 데에 초점이 맞춰졌다.

독서 토론은 끝났지만 이 책을 다른 도서관에서 빌려 읽게 되었다. 지난번에 책도 읽지 않고 독서토론에 참여한 죄책감도 있었고, 인터넷에 올라온 독서후기가 어떤 것이 진짜인지 서로 다른 내용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용은 김용제가 시골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가족 여러 명이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모든 사람이 모두 행복하면 더 좋겠지만 실상 그런 것은 바라기 힘든 것이다. 그래도 어렵고 힘든 사람이 더 아프고 몸도 더 불편한 것을 종종 느낀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난도 대물림하며 부도 대물림한다고 말하는 가 보다. 또 공무원 집안은 대체로 공무원이 많고 의사 집안은 의사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불우한 사람은 그 가족 많은 사람이 불우한 경우가 많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김용제 역시 그런 환경에서 자랐고, 그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김용제가 세상을 살아갈 어떤 명분이나 역할은 없는 것일까. 만약 김용제가 가정에 그리고 우리 사회에 어떤 이익을 주고 갔을까. 사람이 살면서 세상의 한 몫을 해야 한다면 대체로 김용제는 어떤 몫을 했을까 생각해본다. 사회적으로 보이는 측면만 강조하면 김용제는 아무 쓸모없는 삶을 즉 사회의 암적인 존재로 살지 않았나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러면 나는 어떠한가 판단해보자. 조금만 생각해보면 나 역시 별로 쓸모있는 생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태어나고 자라고 배우고 군대 가고 가정을 이루고 뭐 특별할 것도 없고 남에게 모법이 될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삶일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나와 김용제가 별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내가 김용제를 나무랄 수도 욕할 수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김용제처럼 손가락질을 받을 만큼 사형 선고를 받을 만큼 잘못은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와 김용제 사이에는 커다란 강도 없고 높은 담도 없다. 그러 도낀개낀인 셈이다.

그러면 사람의 판단이 아닌 신의 판단에서는 어떠할까. 종교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김용제는 그런 삶을 통하여 우리 보통의 인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즉 신의 계시에 의해 인간에게 주는 암시이며 어떤 형태의 경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그냥 사형선고를 받고 그냥저냥 살다가 죽었다면 아마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형선고를 받은 날부터 일기를 쓰면서 사실은 일기는 아니고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속죄의 눈물이었을 것이지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도둑질과 방화, 증오와 갈등, 거짓말과 속임, 그리고 폭력과 문란한 성생활 등이 비록 김용제에게만 있는 것은 아닐진대 왜 사형수 김용제를 통하여 그런 단어들을 들어야 할까. 그것은 바로 신이 우리에게 주는 경고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형 선고를 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사형 선고를 받으면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사형 선고를 받지 않을 사람은 누구인지. 이 모든 것이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존재 혹은 신에 의해 계획되고 진행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데, 그것을 아무리 노력해도 잘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누구나 혹은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일을 굳이 사형수 김용제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반성하게 하는가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된다.

설사 이런 일이 신과 나의 관계 즉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나는 지금 어떤 일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떤 환경일 때에 이룩되는 가를 생각해보면 짐작할 수 있다. 김용제가 일반 사람보다 더 잔인하고 더 몰상식한 행동을 하였다 하더라도, 내가 그를 욕할 자격은 없다. 나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그럴 자신도 없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김용제와 같은 혹은 더 잔인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행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 않은가.

이런 차원에서 생각하면 김용제가 쓴 이 책 즉『마지막 사형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책이 김용제를 두둔하고 위로하며 감싸주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런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하자는 목적에서 나왔다고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잘못하면 김용제가 사형선고를 받듯이 모든 사람이 사형선고를 받으면 안 되기 때문에 조심하고 각성하자는 의도에서 나왔다고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일반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씨알이 안 먹혀들어갈 것이기에, 사형수 김용제가 말했다고 하면 그래도 조금은 씨알이 먹혀 들어갈 것 아니겠는가 말이다.

거창하게 용서와 화해를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런 사회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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