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독후감, 독서

백가쟁명

꿈꾸는 세상살이 2016. 1. 16. 19:53

 

 

 

 

 

백가쟁명

 

이중톈/ 김택규 역/ 글항아리/ 2015.01.23. 241쪽

 

이중톈 : 중국 최고의 역사 고전해설가로 꼽히고 있다. 고전을 현대적 시각으로 풀어내는 기술을 가지고, 2006년 중국중앙텔레비전의 백가강단이라는 인문학 프로그램에서 삼국지를 강의하여 밀리언셀러로 만들었다. 이후‘이중톈 현상’을 만들어냈고, 강연과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그간 16권의 책을 냈고,『품인록』,『제국의 슬픔』,『독성기』,『이중톈, 정치를 말하다』등이 있다.

 

김택규 : 인천 출생이며, 중국현대문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출판 번역과 기획에 종사하며 한국외국어대학교와 숭실대학교에서 번역을 가르치고, 역서에『죽은 불 다시 살아나』,『이혼 지침서』,『사춘기』,『독종들』,『아큐정전』등이 있다.

 

백가쟁명의 시작은 공자의 덕치주의와, 기원전 513년 노나라의 소공(昭公) 때 진나라가 정나라의 정치이념을 이어받아 법치주의를 표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후자는 법가가 주장을 받아들여 백성들이 법을 알고 잘 행하도록 하는 것 즉 규율을 잘 지키도록 하는 정치를 펼친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이에 반대하여, 백성들이 법을 두려워하여 공포를 느끼지 않는 생활을 하여야 하며 이는 곧 예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백가쟁명의 가장 큰 쟁점이다. 덕치는 법으로 다스려 백성들은 형벌을 두려워하지만 그 대신 예를 내세운 부끄러움을 잃게 되며, 예로 다스리면 부끄러운 점을 알아 사람의 도리를 한다는 주장이다.

 

공자도 죽고 법가도 죽은 지금에도 백가쟁명의 결론은 나지 않았다. 아니 아마도 영원히 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에게 성선설이 있고 성악설이 있듯이, 통치에도 덕치와 법치는 항상 공존하면서 필요에 의해 순간순간 선택되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위나라의 장군 오기가 전쟁터에서 부하에게 난 종기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어 치료해주는 것이 진정한 자애인가 아니면 계획된 법치인가를 생각해보게 한다. 오기 장군은 진정으로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어 치료를 도왔다고는 하지만, 그 부하는 그런 장군을 존경하며 감격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전장의 선봉에 섬으로써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다. 결론을 말하면 하찮은 종기가 사람을 살렸는데, 그 치료를 통하여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그러면 오기 장군의 행동이 진정한 예인가 아니면 법치인가. 그 답은 아무도 내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백가쟁명의 통일된 하나의 답은 없는 것이다.

 

진나라 장양왕의 아들로 성은 영이고 이름이 정인 영정(贏政)은 다음 임금이 되고 천하를 통일하여 진시황(秦始皇)이 되었으나 그가 죽은 지 4년 만에 진나라가 멸망하였다. 전한의 7대 황제 유철은 선황인 경제의 아들로 태어나 천하를 통일하고 한무제(漢武帝)가 되었다. 이때 한무제는 공자의 사상을 따랐다고 전하며, 진시황은 가장 대표적인 법치군주로 통한다. 그러나 이들이 기원전 200년에서 250년 경의 사람이라 확실한 근거를 찾을 수는 없고 어떤 측면에서는 이 두 가지 학문이 영원히 풀리지 않을 인간 본성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한편 이런 백가쟁명으로 학문적 난상토론을 하고 있을 때 서양에서는 피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학자들이 있었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는 바로 이론적이었느냐 아니면 실천적이었느냐로 귀결될 수 있다. 피타고라스가 수학을 논하면서도 ‘피타고라스정리’와 같은 실천적인 학문을 연구하였으며, 이념철학보다 생활철학이 활성화되었다.

따라서 이때 벌써 서양과 동양의 생활정치가 다르게 출발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정치문화가 서양에서 더 일찍 발달하였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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