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창이야기
최동현/ 신아출판사/ 2011.05.05/ 223쪽
최동현 : 전북대학교 졸업, 문학박사. 전북작가회의와 전북민예총 그리고 판소리학회의 회장을 역임하였다. 군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있다. 저서에『판소리연구,『판소리란 무엇인가』,『판소리 명창과 고수 연구』,『판소리 이야기』,『동초 김연수바디 오정숙 창 오가 전집』,『판소리 길라잡이』,『판소리 동편제와 서편제』등이 있다.
판소리 명창에 관한 내용을 찾다가 집어든 책이다. 물론 이 책은 아주 오래 전에 가져다 놓고 읽지 않고 있었는데 오늘 비로소 이 책의 필요성을 느껴 읽게 되었다. 이 책은 판소리 명창에 대한 요약집이다. 우리가 말하는 명창 모두를 다 아우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잘 알려진 명창에 대하여 간단하게나만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나는 이런 책이 더 알맞다고 생각한다. 우리 같은 판소리의 문외한은 이정도면 충분한 것이다.
사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내가 사는 익산에 얼마나 유명한 명창이 살고 있었는지 혹은 익산 출신 명창은 누구인지가 주목적이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전국의 유명한 명창 몇 명 중에서 익산 출신이 있으면 얼마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물어보나마나 답은 나와 있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명창 23명 중에는 정정렬과 겨우 한 명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정정렬마저도 출생에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김제 백구 흥복리라는 설도 있고, 익산 망성 내촌리라는 설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각자 이를 구전으로 기억하는 주민들이 존재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경우 어느 쪽이 더 성대한 축제를 열고 잘 기리는가에 따라 고향이 결정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말하자면 시의 세력이 누거 더 큰가가 문제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시세가 약하더라도 누가 노력하여 추모하는가 혹은 누가 더 그를 그리워하는가가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실 광대라 불리던 소리꾼에게 이런 문제는 전국적으로 비일비재하다. 그렇다면 익산으로서는 이 한 명도 감지덕지다. 왜냐면 전국의 많고 많은 지자체 중에서 그래도 한 명이라도 있는 것이 어디인가.
한편, 광대는 조선시대에 소리로 먹고 사는 전문 직업인에 속했다. 관청의 공식 행사에서 흥을 돋우거나 관리의 부임 행차 그리고 연회에서 소리를 하던 사람들이다. 일부는 양반의 여흥을 맞춰주는 들러리도 활용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신분적 차별로 인하여 광대라는 직업에 대한 편견은 천민의 고달픈 삶이라는 골이 깊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등장인물 23명 중에 월북자 박동실을 별도로 마약을 했던 사람이 2명이나 나타난다.
책에 나오는 명창 중에서 가장 목소리가 좋지 않은 사람이 바로 정정렬이다. 말하자면 쉰소리를 내는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호감이 가지 않으며, 오래 듣고 있으면 싫어지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정정렬은 많은 노력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소리꾼으로 인정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장시간 소리를 내려면 고운 목소리를 일부러 쉬게 만들어서 가꾸는 것에 비하여, 정정렬은 처음부터 쉰 소리를 통하여 목소리를 다듬는 과정을 거친 것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정정렬의 목소리는 아주 안 좋은 목소리로 목소리 구분 중에 ‘떡목’에 해당한다. 지금 익산에서는 ‘떡목소리 축제’도 열리고 있다. 이는 곱게 잘 부르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성의만 보이면 된다는 식으로 전개되는 축제다.
이 책의 주인공을 설명하면서 곁들인 명창이 있는데 그들 중에 이기권이 등장한다. 이기권은 정정렬의 제자로 해방 전후에 말하기를 북에는 박동실이요 남에는 이기권이라 부를 정도로 유명한 명창이었다. 그런 이기권은 익산 출신이다.
반면에 쑥대머리로 잘 알려진 임방울은 본디 고운 음성으로 사람을 매료시킨 소리꾼이다. 게다가 그의 등장은 혜성처럼 갑자기 나타난다. 1929년 9월 12일부터 10월 31일까지 일본이 조선침략을 합법화하기 위하여 조선박람회를 개최하고 민심을 달래려던 차에 호객용 야외공연을 하러 왔던 임방울에게 절세의 기회가 찾아온다. 외숙이던 김창환이 동아일보가 개최한 명창대회의 참가를 권유한 것이다. 그리하여 9월 14일과 10월 22일 두 차례의 방송 출연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고운 음색과 멋드러진 소리는 사람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뿐만 아니라 때마침 등장한 유성기는 임방울의 쑥대머리를 녹음하여 전국에 퍼트리는 활약을 해주었다. 그런 임방울의 사망일시를 두고 말이 많았다. 혹자는 1961년 3월 7일 밤이라고 하기도 하며 어떤 이는 3월 8일 또는 3월 10일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고인의 장녀 임오희에 의하면 3월 8일 새벽이라고 하였다. 이는 필시 신문에 조금 늦게 발표한 그의 사망일시를 마치 신문 발행일에 사망한 것으로 착각한 결과일 수도 있으며, 3월 7일 밤인지 아니면 8일 새벽인지 잘못 전달되어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광대에 대한 사회 인식이 달갑지 않았던 때문에 명확한 자료가 전해지지 않고 있는 부분이 많이 있음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부른 노래 역시 전해지지 않고 있어 당대의 사실을 확인하지도 못하지만, 당시 불렸던 노래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큰 문화계의 손실이라 할 것이다.
다시 출생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보자. 1940년 발행한 익산군지에는 송흥록의 고향이 익산 웅포라 하였고, 10년이나 공부한 곳인 십장유암과 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설로는 남원 운봉출신이라고 하니, 이처럼 전해지는 내용들이 조금은 와전된 것이 아닌가 한다. 후손들에 의하면 송흥록의 동생인 송광록이 말년에 웅포에서 지냈다고 하며, 송흥록의 아버지대에 익산 여산에서 남원 운봉으로 이사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남원에서 태어난 형 송흥록은 창원 등지로 돌아다녔고, 동생 송광록은 선조들의 고향인 익산으로 돌아가서 살았다고 보여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그것도 익산 여산이 아니라 익산 웅포였다는 것은 조금 더 조사해야 할 대목이다.
이화중선의 경우는 더 심하여 호적에는 목포출신으로 되어있지만 지인들은 대구에서 나고 벌교에서 자랐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창극사 자료에는 부산출신으로 기재되어있기도 하다.
서편제 판소리의 시조 박유전 같은 경우에는 전남 보성에 가면 유명한데, 이는 박유전이 말년에 보성에서 지냈다는 연유에 기인한다. 그런가하면 태생지 순창에서는 그를 아는 사람도 없고 그에 대한 자료조차 없다. 이처럼 예전의 소리꾼은 출생지나 그 연대가 명확하지 않는 예가 많다. 당시 직업적으로 천대받던 것이 그들을 위축되게 만들었을 것이다. 또한 직업상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 주거지를 고정시켜 말하는 것이 이상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송만갑은 자신이 스스로 낙안 사람이라고 하였으나 호적상으로는 구례에서 태어났으며 살았던 것이 증명되고 있다. 그래서 구례와 낙안 두 곳에서 서로 자기 고장 출신이라고 버티며 기념식 등 관련 행사를 하고 있는 형편이다.
반면에 양반출신 소리꾼 김세종, 권삼득, 정춘풍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양반 가문에서 소리꾼이 나왔다고 하여 호적에서 파내는 경우마저 생겨났으니 그들이 얼마나 천대를 받았는지 짐작할 만하다. 양반 출신 소리꾼은 비갑(非甲)이라 부르며, 혹은 비가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래 소리꾼이 천민 출신으로 동가비 혹은 동갑인데 반하여 부른 이름이라 할 것이다. 동갑은 소리마당에서 상하 구별보다는 그저 역할에 충실하다보니 연령에 대한 구별이 없이 그저 같은 동갑내기로 여기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을 것을 여겨진다. 그래서 그들을 동갑(同甲)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들은 대개가 스승을 찾아 소리를 배우게 되는데, 일정한 학교를 다니거나 신식 학문을 배운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1931년생 김연수는 중동중학을 졸업할 정도로 신식학문을 배운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항상 이론적이며 사물을 따져 논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1929년생 임방울이 당대 최고의 소리꾼으로 자신의 감을 통해 부르는 소리에 대하여도 이론적으로 지적하며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1950대 중반부터는 자신의 판소리에 대하여도 다시 생각해보고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그가 판소리 다섯바탕을 완창하여 녹음한 것이 벌써 1967년 이전의 일이 되었다. 김연수의 소리는 당대에 빛을 발하지 못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에 운초 오정숙같은 제자들에 의해 더욱 유명해지면서 사랑을 받게 되었다. 이는 임방울제가 맥이 끊어진듯 보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판소리가 원래 남성들이 부르던 소리였으나 박초월, 김소희, 박록주가 등장하면서 여류 소리꾼이 인기를 얻었다. 원래는 진채선에 의해 여류 소리꾼이 탄생하였지만, 정작 진채선이 부른 소리는 녹음하여 전해지는 것이 없어 그 진가를 알 수가 없다. 박초월의 호적이름은 박삼순, 박록주의 원래 이름은 박명이, 김소희는 본명이 김옥희였다. 1905년생 박록주는 1917년생인 김소희와 박초월보다 12살이나 더 많고, 1927년에 첫 음반을 냈으며, 창극 여류 스타의 출발점이라는 광대였다. 그러나 김소희가 등장하면서는 춘향역에 김소희, 향단역에 박록주로 뒤바뀌어 등장하게 된다. 이만큼 김소희의 비중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점기에 낸 녹음 음반을 보더라도 박록주는 153장, 박초월은 9장, 김소희는 103장이었다. 그러나 김소희는 천의무봉이라는 소리를 가졌고 성대의 기량과 음질 그리고 음량까지 모두 갖춘 최상의 조건이었다. 게다가 천성은 부족하지만 노력으로 명창이 된 정정렬의 소리를 이어받아 서민들에게 애환과 환희를 그대로 전달해주는 여성 소리꾼으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박동진은 1968년 우리나라 소리 최초로 다섯 시간 흥보가 완창을 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광대라고 불러주기를 기다렸다. 앞서 지적한 대로 광대는 소리를 하여 먹고 사는 전문직업인이었음을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야 자신이 스스로 노력하고 더 좋은 소리를 할 수 있도록 다듬을 수 있다는 신념이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다른 소리꾼들이 자신을 광대하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꺼리거나 아예 피하던 것과 대조되는 대목이다. 심지어 신군부의 대부였던 전두환 앞에서도 ‘저 머리 벗어진 놈’이라는 즉흥 사설을 소리로 이어내어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던 인물이다. 이처럼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하여 자부심이 강하고 떳떳하게 행하던 진정한 소리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 외에도 일일이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 명창이 더 있고, 그에 설명하는 차원에서 곁들인 명창이 아주 많다. 그러나 이들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며, 그런다고 하여도 일반인들이 그것을 다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또한 처음 책을 펼쳐든 목적인 나의 고향 익산에서 난 명창이 누구인지를 파악하기 위한 것에는 전혀 다른 문제이므로 여기서 그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