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를 생각하며
『채식주의자』의 저자 한강은 아버지 한승원씨와 오빠 한동림씨가 소설가이며, 남편은 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말하자면 문학적인 환경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여러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는 상업성과 대중성이 없는 글을 써왔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순수하며 예술성을 추구하는 작품으로, 좋은 글을 쓰겠다는 신념의 표현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일상의 한 주제를 택하여 소설로 썼다는 것일까?
멘부커상을 부상을 받았었다. 세계 문학상에서 우리 문학성을 부동의 격리성이 받았다. 그러나 영혜독서에는 부터성이없는 안 된다. 이제서는 채색으로는 건물 성으로 견실부성으로 식물성이 부합되었다.
이 책에는 세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처음에는 표제와 같은「채식주의자」로 화자는 주인공 영혜의 남편이며, 두 번째는 이상문학상을 받은「몽고반점」으로 영혜의 형부가 화자로 등장한다. 마지막「나무불꽃」은 주인공의 언니가 상황을 설명하며 이끌어간다. 채식주의자가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표현한 것인지, 아니면 채식주의자도 육식주의자와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이 단편소설을 쓴 시기가 각기 달라서 내용적으로는 약간 이질감이 보이지만 연작의 형태로 이어졌다.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수십 년 전에 채식을 강조하던 의학박사가 떠올랐다. 그는 유난히 채식을 강조하였는데, 몸이 마르고 볼이 움퍽 패였으며 광대뼈가 나왔었다. 한편 그와 동기동창인 어느 의사는 몸이 통통하며 얼굴이 반지르르하여 매우 대조적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주인공 영혜와 채식을 주창하던 의사의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채식이 중요한 것은 알겠지만, 둘 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도 동시에 알려준 채식 전도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음식을 접하면서 채식주의자가 먹는 것과 일상에서 음식을 가려먹는다는 것은 천양지차다. 후자는 형편에 따라 따져 먹지만, 전자는 먹지 않기로 한 것은 절대로 먹지 않는 기준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채식주의자는 어떤 육식도 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만약 때와 장소를 가려가면서 육식을 한다면, 그는 음식을 가려 먹을 뿐 절대로 채식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영혜는 채식주의자이다. 말하자면 육식은 절대로 하지 않는 말 그대로 채식만을 고집하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이 영혜처럼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은 어렵지만, 어떤 계기에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책을 읽어가면서 어느새 나도 모르게 채식주의자 영혜를 점차 이해하고 동조하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주인공의 덫에 걸려든 것이다.
주인공은 계속 이어지는 결심에 먹는 것을 절제하는 금욕주의자로 변해버렸다.
첫 소설「채식주의자」는 보통의 사람이 채식주의자로 변해가는 모습을 그린다. 어릴 적에 개에게 물린 적이 있었는데, 그 개는 처참한 죽임을 당하고 사람들의 맛있는 음식이 된다. 영혜는 이런 트라우마와 함께 우울증이 겹쳐 고기에 대한 거부감을 넘어 채식주의자가 된다. 그리고 육식을 하는 사람까지도 혐오하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이미 채식주의자와 비채식주의자 두 분류로 나뉘었다.
이어지는「몽고반점」은 채식주의자가 된 후의 달라진 삶을 전개한다. 주인공은 벌써 일반적인 음식물을 먹는 사람들의 사고를 초월하여, 채식을 통한 자아의 식물화를 갈망하고 있다. 보이는 것 모두를 식물로 연상하며 심지어 자신의 신체 역시 식물의 한 부분으로 인정한다. 식물은 곧게 자라기도 하지만 얽히고 설키며 자웅동체로 살아간다. 스스로 성장하며 생식하는 식물은 어느 곳을 가든 어떤 식물을 만나든 상대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혼자는 미흡하지만 서로가 힘을 합쳐 거대한 공동 안식처 즉 숲을 이루기 때문이다.
제3부에 해당하는「나무불꽃」은 사후 세계를 의미한다. 몸은 아직 죽지 않았지만 최소한 영적 자유함을 얻은 상태로 접어들었다. 자신의 몸은 갈수록 피폐해지더라도 정신은 식물로 변환되었음을 감지하고 있다. 나는 이미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 속에서 자란 식물이 죽어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영과 육의 연관성 따위는 잊은 지 벌써 오래다. 숲의 한 지체인 영혜는 죽음과 삶의 한계가 없어진 상태로, 굳이 먹을 것에 대하여 연연해하지 않는 상황을 제시한다. 진정한 채식주의자로서 이미 도가 트인 상태다.
채식주의자를 비판하자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옹호하자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것을 선택할지 말지는 순전히 자기 몫이며, 그에 따른 결과도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
나는 이 소설을 채식주의자가 되고 안 되고는 본인이 선택할 수 있으나, 자칫 혼동하기 쉬운 옆길을 조심하라는 것으로 해석해본다. 그렇다고 세상과 적당한 타협을 보자는 수준은 아니다. 그 경계는 상업성도 대중성도 아닌 내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정신의 차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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