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사
김동인 : 평안남도 평양 출생으로 일본 메이지학원 중학부를 졸업하고,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1919년 주요섭, 전영택 등 문학 동인지를 ‘창조’라고 발간하였으며,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였다.
배따라기, 감자, 태형, 발가락이 닮았다, 붉은 산, 젊은 그들, 대수양, 운현궁의 봄 등 작품을 냈고, 춘원 연구라는 평론에도 일가견을 보였다.
광화사는 글자 그대로 미친 화가라는 뜻이 있다. 인왕산 기슭에서 살았던 광화사는 이름이 아니라 붙여진 별명인 셈이다. 원래는 솔거라는 이름이었지만, 솔거라는 이름도 없이 붙여진 가상인물이었던 것이다. 솔거는 많은 그림 그리고 멋진 그림을 그려 이름이 자자한 기존의 이름을 빌어 사용한 것이다. 그냥 그린 작가인데 잘 그려서 솔거라고 별명을 붙인 것이고, 자신이 흉측하고 못 생겨서 숨어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미친 듯이 심취한 그림을 그려내야 한다는 사명감을 못 이겨 미루다가 미루다가 마지막 작품을 완성하였다.
솔거가 추남이다보니 사람들과 만나면서 생활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혼자 기거하면서 사람을 기피한 것이다. 마지막 작품을 그리려던 작품의 소재를 발견하였다. 인물이 좋고 아름다운 여인을 흠모한 나머지 물색하고 물색하는 시간이 걸렸다. 반대로 소재인 여인이 작가인 솔거를 보면 기겁을 하면서 도망할 것이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다가가서 소재로 삼을 수도 없다.
그래서 작가가 심중으로 정한 소재가 나타나면 몰래 다가가서 숨어 보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아직 찾지 못한 삶이 지나가고 있었다. 마침내 정한 소재인 여인을 찾았는데, 자기도 심취하여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그 여인은 눈먼 봉사이므로 누가 오는지 그렇게 못 나고 못 난 솔거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자 솔거는 17,8살이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 아이를 집으로 꼬여 들였다.
여자를 본 경험이 없는 솔거, 아는 여자는 오로지 어머니밖에 없기 때문에 다정하며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어머니가 전부였다. 솔거가 그리려는 그림은 누드가 아니라 아름다운 여인이며, 그 얼굴이나 자태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바로 심미안이었다. 그래서 여인이 보여주는 눈과 그런 눈으로 볼 수 있는 깨끗하고 정갈한 마음의 창이었다.
솔거가 꼬인 말은 바로 생각하던 바였으나, 그 여인이 받아들인 것 즉 솔거가 말한 것이 아름다운 용궁이었으며 용궁에 가서 구슬을 얻어보여 준다거나 아름다운 무지개가 보일 수 있다는 바로 눈을 뜰 수 있다는 기대와 아름다운 청년이라는 솔거를 바라보며 해로할 수 있다면 행복하다는 허황된 꿈이었다.
꿈을 이루어주겠다는 약속을 한 솔거는 당황하면서 그 마무리를 하고 모면하려고 애썼으나, 마음을 진정시키고 꿈에서 깨어난 현실을 설득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다가 하룻밤을 지낸 여인을 넘어뜨리고 그림을 그린 도구들을 쏟아버렸다. 그런 참에 여인은 즉시 죽었고, 먹물이 튀면서 화룡점정인 눈동자를 그렸다.
솔거는 그 마지막 그림을 부여안고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그 그림이 먹물로 범벅이고 눈동자도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눈동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솔거가 그림을 들고 다니니 미친놈이다. 이것이 바로 광화사다. 그림을 그린 미친자이다.
작가는 솔거가 바로 그림을 잘 그린 사람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빌어 증명을 해주었고, 얼굴이 추하고 살아가기 힘든 사나이가 현실에서 견딜 수 없다는 것을 묘사하였다. 사람들이 불쌍하고 가련한 남자를 따뜻하게 대하는 삶이 없다는 것을 빗댄 글이다. 강점기에 살면서 팍팍한 삶을 더불어 공생할 수 없는 현실을 한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