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과 버려진 사람들
아카데미상이 92회째 진행되었다. 상을 4번이나 수상한 사람이 역사상 두 번째라 그래도 영광이다. 그것도 여러 작품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 4번의 수상이라니, 유추해보면 전무후무한 기적으로 남을 것이다. 나라가 온통 불난 호떡집이 되고 말았다. 시샘하는 주최측 나라에서는 또 기적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하긴, 예전 이론으로는 불이 났으니 호떡이 익었을 것이고 불이 없으면 호떡을 먹을 수 없다가 불문가지다. 강 건너 불구경은 인정하지만 이웃집 불구경은 허용할 수 없는 우리다. 구경거리라는 주제가 아니라 안타까움과 연민, 도와주자는 인정으로 모여든 이웃사촌임이 분명하다. 사람이 많아서 걸리적거리며, 물을 나르는 바가지와 속불을 헤치는 도구도 없으니 발만 동동거리며, 구경꾼 취급받는 속담이 생겼다.
따져보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어지는 트로피가 오스카란다. 형체가 오스카라는 사람을 닮았다는 이명동인이었다. 미국을 업고 칸영화제, 베를린영화제, 베니스영화제보다 영향력이 더 큰 권위가 되었다. 2019년 칸 72회에서 기생충이 최고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이번 시상하는 아카데미 상은 25개, 일부는 할리우드 벽을 넘어야만 제출되며 영어로 번역된 것에 한하는 것도 있다. 로컬 테스트에 비유된다. 기생충은 6개 부문 후보에 올랐으며, 최종 4개나 수상하였다. 기라성은 11개 부문에 1건 10개 부문에 2건 총 3건이 올랐는데 바로 떨쳐내 기적을 일군 성과다. 신기록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기생충을 버렸다. 해를 끼친다는 백해무익인 인증을 역인증샷 한 꼴이 되고 말았다. 배우와 감독, 그리고 어디서도 밟고 일어나는 민초가 있었기에 부활하는 불사충! 외국에서는 그들을 인정해주었다. 우리 몸속에도 같이 사는 이로운 기생충이 있다는 것을 다시 가르친 셈이다.
지금도 분노하는 진리가 용트림하는 것을 본다. 가까운 지인을 억누르며 숨도 자유롭게 쉬지 못하도록 다그치는 현실이 아프다. 상대를 언감생심 거짓 뉴스를 창출하는 시대가 안타깝다. 아니면 말고 확대 해석하면서 세뇌를 강요하는 세상이 불안하다. 국내에서 쫓아내는 것이 기득권이고 버려지는 사람이 묵묵 매진하는 범부(凡夫)다.
결혼하면 왜 분가하였을까? 처가는 멀수록 좋다는 말은 왜 생겨났을까? 그것은 시대상에 따른 덕담이다. 암도 같이 공생해야 된다는 현실인데, 지금도 기생충을 싹쓸이 버릴까? 그건 카르텔 전형이다. 선과 악을 구별하지도 못하고 음양도 분별하지 못하는 현실, 빛과 소금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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