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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 설거지

꿈꾸는 세상살이 2020. 10. 6. 13:48

대리 설거지

 

예전에는 찬물로 설거지를 했다. 지금은 지난 얘기다.

어머니도 찬물 설거지를 하셨고, 찬물 빨래도 하셨다. 개울에 나가서 하시지는 않았지만 그것으로도 만족하는 삶이었다. 민속화나 풍속화에서 만나는 정도로 변했다. 감사한 세상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 찬물 설거지를 체험하다니 웬 말인가!

나는 어머니의 실세를 다 읽지 못해서 후회하다가 반성하고 통곡했다.

즐거운 명절에 만나는 사람들이 즐겁다며 반가워한다. 먹는 것도 즐겁고 먹이는 것도 행복이다.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도 만족이고 빼앗아 먹는 것도 만끽이다. 비용이 들어가도 자처한다는 세상살이인데 남는 것이 하나 있다면 무엇일까? 설거지다.

설거지를 시작할 때부터 최종 마무리할 때까지 얼마나 긴 고통의 연속이었을까? 누구는 만들고, 누구는 먹고, 누구는 놀고, 누구는 물 가져오라고 하고, 누구는 술상 차리라고 하고, 누구는 안주 올리라고 하고, 누구는 화투놀이하고… 누구는 울고 누구는 치우고.

즐거운 명절을 마치면 끝이다. 다시 기억하기 싫은 명절만 남는다. 명절 이혼 단어가 생겼다. 기억을 지우고 싶은 명절로 남는 현실이다.

나도 어머니의 설거지를 기억에서 더듬어보았다. 내 기억에 지우고 싶은 설거지로 떠올렸으나 보이지 않았다. 아마 슬픈 설거지가 알아서 기억을 밀어냈나 보다.

나는 설거지를 해보았다. 세제가 독하다고 당연 반대하는 사람은 아내다. 나는 어머니의 설거지를 기억하면서 무장갑으로 설거지를 했다. 개울에 갈 시간도 없고, 갈 개울도 없으니 그나마 감사요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자 무대책이 최선이다. 그저 찬물을 막고 퍼내기로.

내가 체험한 기간은 동지부터 입춘까지만. 짧지만 힘들었다. 근력이 없어서 힘든 것이 아니라 느끼는 고통이 정말 힘들게 했다. 나는 참고 참았다. 내가 자초한 일이니 후회하며 번복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가장의 책임으로 남편의 도리로서 고통 체험이었다.

첫물은 얼음을 깨고 손을 담그면 얼음손이 될 정도로 차갑지만, 참고 참으면 다르다는 감도가 느껴진다.

어머니는 찬물 실전 설거지였다는 것을 느낀다. 한겨울의 아침은 내 담당이었다. 아내는 극구 부인하였지만 나는 온수는 절대 사양하고 내 몫을 고수하였다. 거기에도 요령이 있다.

중얼거리며 참고,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참고, 짬이라도 운동하며 참고, 물방울을 세어보며 참고, 참으며 참았다.

그러나 최종 선택은 어머니의 고통을 기억하는 목적이었다. 문고리가 철거덕 들어 붙었던 시절은 무척 추웠다. 추운 육체에 쓰린 마음을 더하면 설움만이 남았을 것이다. 어머니를 회상하면 나는 지금이 곧 행복이라는 것을 인증한다.

아내들이 싫어하는 설거지를 나는 싫어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아내를 행복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설거지를 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리려 설거지를 한다. 자녀에게 전해주는 기억을 남겨주고 싶어서 설거지를 한다. 그러나 공감하는 성인이라면 타인에게 고통으로 다가 오는 경우도 있다.

아내가 바라보는 남편의 찬물 설거지는 원치 않는다. 오로지 최대공약수를 바라는 것 뿐이다. 이것이 우리의 공감이다. 어머니가 살아계신다면 최대 공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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