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산문, 수필, 칼럼

통학하는 맛

꿈꾸는 세상살이 2020. 10. 6. 14:02

통학하는 맛

 

중학교 1학년부터 통학차를 타고 다녔다. 역전 사이의 구간이 짧았지만 그래도 통학차를 타는 맛이 따로 있다. 아침 통학차는 모두 모이니 바쁘고 복잡했지만, 학교가 마치고 나면 여유가 생긴다. 정해진 기차가 올 때까지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찾아서 시간을 메웠다.

천천히 걸어가기, 빵집에 가서 먹기, 튀김집에서 먹기, 만화방에 가기, 독서실에 가기, 역전 구경하기, 지나가는 기차 구경하기, 길거리 구경하기 등 만들기만 하면 하는 일이 무진무궁했다.

학교 교문을 나서면 바로 해방감이 들었고,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생겨났다. 다음 통학차가 올 때까지 얼마간의 여유가 있다는 것도 행복이다. 그저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가 되면 바쁘고 허망한 인생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자주 갔던 곳은 역전 앞이었다. 역전은 그저 광장이었고,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이 제법 멀다. 당시 이리는 정읍선과 전주선 그리고 군산선과 대전선이 모이는 교통의 중심 역이었다. 국가 선로보다는 통학권인 지역 주요 역으로 구분했다.

우선 역에 가서 놀아도 기차를 놓치지 않을 만큼만 돌아다니는 안전권 내에서 구경했다. 도심권 배회하다가 지루하면 서점에 들르기가 주요 코스로 등장하기도 했다. 항일 학생운동기념회관은 1순위 필수 코스로 인정한다.

그러다가 다른 코스를 개발해냈다. 고향 바로 뒷집의 아저씨가 병원에 입원해서부터다. 나는 중학교 1학년이고 아저씨는 40살이 넘은 중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아프시다니 얼마나 아프시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방바닥만 쳐다봤다. 요즘은 침대 병실이지만 그 당시 작은 개인병원은 온돌로 된 병실이었다. 계속 병문안을 다녔다.

아저씨는 우물을 파내고 있었다. 젊은이가 곡괭이로 물길을 파다가 지치면 올라와서 쉰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이 교대하면 진척이 빠를 것이다. 이번에 우물 속에 내려갈 사람이 이 아저씨 차례였다. 내가 보았는데 도중에 짚으로 엮은 새끼줄이 끊어져서 아! 소리와 함께 아저씨가 떨어졌다. 내 생각으로는 이제 죽었구나 하면서 겁이 났다. 그러나 건져보니 한쪽 다리가 부러졌다. 정말 다행이었다. 나쁜 일 하다가 다친 것이 아니라 마을을 위해 좋은 일을 하다가 다쳤으니 하늘이 도운 것이라고 위안으로 삼았다.

그런데 아저씨는 나에게 고맙다고 거듭 말씀하셨다. 열차를 타고 병문안 오는 사람이 없고, 아내분도 매일 오는 것이 어렵다고 하셨다. 나는 시간 때우기 위해 병문안을 왔을 뿐인데, 무슨 큰일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엉거주춤하다가 이제 통학차가 온다며 병실을 나섰다. 그래도 아저씨는 연신 고맙다며 조심히 가라고 배웅하셨다.

퇴원 후에도 이 말을 마을에 두고두고 선전하셨다. 나는 의리의 표본으로 등극하였다. 그저 놀기보다 간단한 병문안으로 실천형 마을 효자로 통한다. 증거가 그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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