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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고 오래된 제방은 어디인가

꿈꾸는 세상살이 2023. 1. 12. 09:02

국내 최고 오래된 제방은 어디인가

<미르 282021.09.01 를 읽고나서>

 

우리가 알아온 국내 최고 제방은 김제의 벽골제였다. 그러나 다시 인근의 익산에서 발견된 자료에서는 익산의 황등제가 최초 농경용 제방이었다는 발표를 했다. 이것도 익산시가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전라북도 문화재연구원과 함께 발간하는 소책자인 본 미르에서도 알 수 있다. 이것도 공식적인 기관이니, 인물을 퍼나르기 위한 허위 조작이 아니다.

 

익산 황등은 익산시 관내 황등면이다. 지금도 가장 큰 읍면동이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 시 접경지라서 아파트 단지를 만들어서 인구가 늘어난 지역을 제외하고는 순수 자생적 큰 면이라는 말이다. 인근에 읍이 있어도 전혀 주눅들지 않고 살아가는 지역이다. 황등이 왜 떠야하나? 농경시대에 그랬으니 되지. 지금도 인간의 주식량을 쥐고 있어야만 살아남는 시대이다. 우리에게는 쌀이 주식재료이다.

1909년 임익수리조합이 설립하면서 황등제가 요교호로 불렸다. 익산과 이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물이 있어야 한다고 만들어낸 일본강점기의 증거이다. 그러다가 1935년 완주군의 경천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황등제 즉 임익수리조합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시들어졌다. 그래서 황등제 내부의 물이 모두 흙으로 메워지면서 농토로 변해졌다. 겉으로 보이는 남아 있는 흔적은 독수문밖에 없다. 독수문은 독 즉 돌로 되어있는 임익수리조합의 주요 기능을 담당하던 수문이라는 고유명칭이다.

 

그 전에 생긴 황등제를 왜 주장하는 것일까.

1454년 조선왕조실록과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황등제를 언급했다. 1670년 반계수록과 1760년 성호사설, 성호선생전집에서도 등장했다. 1770년 문헌비고와 증보문헌비고에서도 언급되었다. 1798년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에서도 언급해놓은 황등제이다. 1756년 여지도서에서는 료곶제로 기록되었다가 1756년 금마지에서는 상시연과 료곶제로 기록되었다. 1866년 편찬된 대동지지에서는 상시연으로 나타났다. 그러니까 역대 지도를 보면서 같은 지역을 비교해보니 상시연과 료곶제 그리고 황등제가 같은 말이라는 해석이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한다면 증거가 있다. 같이 확인해보자 하고 황등제 제방의 부지에 대한 실사를 해봤다. 시굴한 면적은 397에 좁은 면적이었지만 증거 자료는 동일하다. 기저부의 폭은 약 22m, 잔존높이는 4.9m로 확인되었다. 제방은 물이 침투하면 무너진다. 이를 방지하려고 점토 흙덩이를 교차 쌓기했다. 그 사이사이에는 풀과 나뭇잎을 깔았다. 이것도 김제 벽골제를 확인 것과 동일하다.

기저부는 점토뻘인데 주변에는 갈탄도 널려있다. 내가 어릴 적에만 해도 땔감이 없으면 질 좋은 갈탄을 파서 말리면서 일부 골라서 사용하기도 했었다고 여긴다. 나는 갈탄을 직접 활용한 적은 없었지만, 그 때 갈탄을 고른 후 질이 나빠서 버린 잔재는 확인했다. 지나친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그 정도로 되어 있는 주변 환경은 인정한다는 증언 정도라고 하는 것은 무방하다. 제방의 하단부 약 3m 깊이에서는 지름이 약 10cm에 달하는 나무를 사용했다. 대략 3~4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로 교차하는 즉 십자가 모양으로 나무를 깔았다. 지금으로는 시멘트 콘크리트를 치기 전에 철근을 서로 교차하는 모양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때 발견된 목재의 탄소연대를 측정해보니 BC 5~ 3세기 정도로 측정되었다. 이것도 못 믿겠다고 3군데 기관에 의뢰했더니 별반 다를 것 없이 동일했다. 기저부 지층 토양을 분석해보니 BC 40 ~11세기에 해당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니까 그 전부터 황등 지역에서 농경 생활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음직하다는 해석이다.

그러니까 백제시대 즉 평균 BC4세기를 추정하면 중국의 전국시대에 해당된다. 진나라와 한나라가 성행할 때이며, 한국에서는 마한이 성립되는 시기였다고 알면 된다. 그 증거로는 진나라와 한나라에서 유행하던 화폐와 청동거울이 익산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 둘이 서로 대등하게 거래하고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 기록이다.

그러니까 그 기술로 황등제를 쌓았으니 굳건히 남아왔다고 알면 된다. 익산에서 발굴된 금왕관과 금신발도 유명하다. 그의 분구묘와 옹관묘도 그렇다.

 

나는 익산에서 태어났다. 시가지는 아니었지만, 바로 황등 태생이다. 그래서 나는 황등제에 대한 내용을 어렴풋이 알기는 했었다. 그래도 한두 가지는 증거를 삼아서 글에 쓰기도 했고 올리기도 했다. 나는 익산 사람이다. 내가 죽기 전에는 불변이다. 만약 익산을 떠나 다른 곳에서 살아도 익산 태생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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