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살 것인가』를 읽고 독후감 쓰기
‘제목이 살렸다’라는 부제로 떠오른다.
책 제목을 특이하게 만들어야 많이 팔린다. 국민적 공감대로 부각하는 문제를 거론해야 잘 팔린다. 이런 단어도 이제 실감난다. 내 책을 쓰면서 어떤 제목을 붙일까 고민해오던 중 이 책을 읽기 며칠 전에 알았다.
어디서 살 것인가 하면 독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구체적으로 서울, 용인, 근남면, 춘천, 남이섬, 제주, 시드니, 로마 등이 거론될 것이다. 저자가 독자에게 어디서 살 것인가를 물었으니, 읽은 내가 답을 줘야 되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어디에서 살고 싶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냥 문제점을 나열하면서 다른 외국의 사례를 대안으로 거론했다. 결과적으론 저자가 묻고 저자가 답하는 형식으로 이어간다. 독자가 원하는 저자의 답은 명확히 거론하지 않았다. 이 책은 단답형으로 ‘여기다!’하는 곳을 지목하지 않았다. 아니 지목을 할 수는 있겠지만 독자와 저자의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주어진 환경과 구매력의 과다가 다르기 때문에 답이 없어서 그럴 것이다. 또 그래서 만족한 도시에서 만족한 집을 사고 살아갈 수는 있다고 해도, 긴 시간을 만족할 수도 없어서 그럴 것이다.
예를 들면 좋은 펜션에서 살아봐도 한 달 혹은 일 년 만에 팔고 나가고 싶은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 집을 설계한 사람도 거기서 거주할 의향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즉각 벗어나고 말 것이다.
그런데도 저자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어려운 대안을 들먹일까? 긴 세월동안 터를 삼아 살아온 거주 즉 주택에 주안을 두고 비교해봤다. 방보다는 거실을 크게 한다든지, 방에 각각 침대를 넣는 대신 같이 사용할 간이용 빈 방을 만들어주자는 말이다.
또 학교의 담을 헐어내자는 주장도 있다. 그러면 같이 바라보는 면적이 늘어나고, 공원의 담도 헐어내면 다 같이 공원에 가기가 쉽다는 주장이다. 맞는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도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었으면 되지 벌어진 뒤 이제 와서 거론되느냐는 의문도 있다. 넓게 보면 도시를 만드는 계획을 이렇게 입안하라는 주장이다. 개인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정책적 리더에게 해당되는 책이다. 신도시를 설립할 공청회 때 민간 시민도 참여시키면 항의도 하고 의견도 내면서 토론을 하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일 수도 있다.
홍길동은 왜 서울과 평양을 버리고 외딴 섬을 찾아 나섰을까. 여기저기 수정할 곳이 너무 많아서 수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후자는 계획도시보다 더 많은 비용이 따르고, 시민들도 이해관계가 달라서 싸우고 힘들어지게 된다. 누군가가 기득권을 내놓지 않고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말이고, 누구든지 특혜를 받아먹겠다는 말이 떠오르고 만다.
거시적으로 보면 사람마다 동일한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주장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교육적 차원이므로 당장 거론하지 않겠다는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주장은 현재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는다든지 너무 불편해져서 변경해 달라고 민원을 내면 차근차근 발전하고 점차 효율적인 도시가 된다는 해석이다.
시대가 집중화되면서 살아가는 시스템도 논스톱 구조에 편승해야 된다는 말이다. 옛 농경 시대의 거주는 현 인터넷 시대의 무인 자동차를 믿고 살아가는 시스템으로 만들어져야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개인이 할 일이 아니며, 할 능력도 없다. 그러면 시민은 굿이나 보고 주는 떡이나 먹자는 말인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도시계획 변경은 힘들기 때문에 반대급부적으로 지불하는 비용과 시간을 더 많이 요구한다. 공동의 인생을 항상 성공적으로 살아만 갈 수도 없다. 시대가 변하는 것을 직감하고 내일은 어떻게 변할지 점치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시쳇말로 점쟁이도 사람이기에 점을 쳐도 대부분 틀리고 만다.
그러면 확신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오로지 세상을 주도적으로 앞장서서 주무르면서 살아가면 된다.
우리나라의 난방 및 취사용 연료를 예로 살펴보자. 솔잎이나 지푸라기를 연료로 사용하다가 석탄, 그러다 등유를 썼다. 그 후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 연료에 경유와 휘발유를 사용하는 시대, 그 뒤로는 전기를 활용하는 시대로 변했다. 그러나 다음 시대는 원자력이나 수소를 사용하는 시대가 주도할 수도 있다.
또 주택용 재료는 풀잎으로 지붕을 이어 살았다가 갈대나 볏짚으로, 흙벽, 나무, 시멘트, 점토 기와, 스래브 지붕, 경량 판넬 지붕으로 변해왔다. 그런 다음은 무엇이 다가올까. 이것을 파악하는 것이 문제이고, 저자가 물어온 답이라는 저자의 의견이다.
저자의 말이 맞다고 치면 누가 알아 파악할 것인가가 문제다. 그의 주장은 모험심과 개척정신을 상상력에 얹어서 펴보자는 말이다. 그런데, 상상력을 펴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것이 바로 넓은 공간을 권장하는 주제이다. 닫힌 공간에서는 사고도 닫히고 몸도 멈춘다는 주장이다. 학교 담을 헐어내면서 넓어진 공간, 즉 학생들의 상상력도 넓고 높이 뻗어난다는 말이다. 아마존 창업자, 투자의 귀재, 아인슈타인, 마이크로 소프트 창업자 등은 넓은 곳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넓은 토지를 가진 나라에다가 각자 가진 주택의 공간 면적을 마음껏 펼쳐내는 기회를 가졌다고 말했다.
어려운 단어가 생기면 사전에서 찾아본다. 걸어 다니면서도 손쉬운 핸드폰을 활용하면 빠르고 편리하다. 그러나 내가 찾은 단어 외에 다른 단어는 다시 찾아보아야 한다. 이때 종이 사전은 내가 찾은 단어 앞과 뒤에도 적혀있는 단어를 동시에 검색할 수 있는 덤으로 얻게 된다. 이것이 벽을 넘은 공간으로 엮여있는 시스템이라고 본다.
물리적 닫힌 공간은 정신적 상상력도 좁아지고, 넓어진 공간에서 자라는 아이의 상상력도 훨씬 더 커진다. 즉 근시적인 사고와 거시적인 사고의 차이다. 바로 코앞만 생각하는 상상력은 항상 뒤에서 수습하고 마무리하는 인생을 안고 산다.
당장 성공이 아니더라도 넓은 상상력을 가진 사람은 앞을 선도하는 개척정신으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거기다가 동조자를 만나면 큰 소리로 외치고 앞에서 일을 벌여놓고 살아가는 인생이 된다.
창시자는 곧 실패하더라도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는 선구자로 변신한다. 현 시대를 떠나 미래를 짊어질 미래를 꿈꾸는 사람이어야만 미래를 주도할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당면한 문제를 검토해보자. 조선 시대에 지었던 건축 즉 기와집이 얼마나 견뎌주었을까, 200년을 넘어 300년도 되는데 뜻하지 못한 화재를 만나 소실되었을까? 지금 지어지는 아파트는 얼마나 견뎌낼까! 길어야 기껏 50년? 사람의 수명은 건강하면 칠십이요 길어도 팔십이라는 말에도 못 미쳐서 너무 짧지 않을까? 어떤 설계를 했기에 그랬을까! 설계는 완벽했는데 시공이 그래서일까?
우리 아파트는 구조적으로 잘못 되어서 그런가? 의도적으로 빨리 무너지기를 바라는 아파트로 지었을까?
나는 주택 한 채에서 8가구가 같이 살아온 경험이 있다. 그때 화장실은 단 하나, 얼마나 조급하고 답답하였을까! 전혀 필요 없는 경쟁 틈바구니에서 얼마나 치열하였을까! 그런 주거에서는 또 다시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럼 어디서 살 것인가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그 대답은 간단하다. 아파트 수명이 긴 아파트였으면 좋겠다. 한 가구 사는 집에 화장실이 두 개 있으면 좋겠다. 남향이면 좋겠다. 에어컨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좋겠다. 음식 쓰레기를 자동으로 분리배출 하는 시스템이면 좋겠다.
그러나 저자는 거기서 다른 조건을 다는 주거를 원한다. 잠을 자는 방은 좁아도 거실은 넓은 공간이면 좋겠다. 무엇이든 만지고 부셔보는 작업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별도로 차고가 있으면 좋겠다. 던지고 뛸 수 있는 넓고 높은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집을 떠나 공용 즉 학교와 공원, 동사무소, 도서관, 운동장, 체험장, 수영장, 빈 공터 등이 있어서 닭장을 벗어나는,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당장 성공할 수 없어도 실패를 발판 삼아 다시 도전해 보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현 시대에 맞닥뜨리는 결론이다.
한낱 꿈을 지나 공상력을 그려보고, 상상력을 실제 개척하는 실행력이 바로 사람의 미래를 주도하는 미래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작은 꿈도 없었던 아버지가 아이에게 물려줄 훌륭한 유산은 무엇일까. 그것은 간단히 말해 작은 꿈을 크게 부풀려 채울 수 있는 공간을 주면 된다는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