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구경 I
봄이 되니 가지마다 푸릇푸릇 새싹이 돋기도 하고, 어떤 나무들은 꽃망울부터 터뜨리기도 한다. 이른바 꽃이 피는 계절이 온 것이다. 내 주변에도 온통 분홍색이 만발하였다. 예전 같으면 양지바른 산과 들에서 시작되는 것으로만 알았던 봄소식이 이제 시내 한 중심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봄도 차가웠던 자연보다 따뜻한 사람을 더 그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사람 많은 곳에서부터 봄이 오는 것은 가히 이상할 것도 없는 자연현상이다.
나뭇가지에 뭔가가 맺히면서 분홍색이 돌더니 그 다음은 순식간이다. 벚꽃이 피는 속도가 마치 경마장에서 출발선을 차고 나가는 말들과 흡사하다. 이처럼 벚꽃은 서로가 먼저라고 다투어 피어났다. 항상 그랬듯이 아마 다음 주말에는 제대로 된 꽃을 볼 수 있겠구나 하였어도 한 번도 맞혀본 적이 없다. 식구들을 대동하고 애써 약속시간에 대어도 벌써 꽃잎이 떨어지기가 일쑤였다.
올해 벚꽃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중에 봉오리가 맺히고 달콤한 바람이 부는 것으로 보아 늦은 주말이면 꽃을 볼 수 있겠거니 하였다. 그러나 기대는 빗나가고 있었다. 허실삼아 나가본 길거리에서는 벌써 꽃구경을 하는 무리들의 인파가 지나다닌다. 내가 좀 늦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이 꽃향기마저 다 가져간 것은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원래가 향이 연한 벚꽃인데 바람이라도 불어서 향을 떼어 갔다면 참으로 서운할 뻔한 일이었다.
내친 김에 야간 벚꽃구경도 해본다. 자동차로 빛을 비춰가면서 천천히 구경을 하면 검정바탕 위에서 보이는 하얀 꽃잎이 온 세상을 밝게 만든다. 멀리 떨어져있는 나무는 달랑 막대기 하나에 커다란 솜사탕을 느낌이다. 누가 먹다 만 것인지 참으로 크기도 큰 솜사탕이다. 낮 동안 맛있게 먹다가 갑자기 사라진 유치원신데렐라가 아닐지 생각도 해본다. 마치 내일 다시 오마고 약속이라도 하듯이 줄줄이 세워놓았지만, 나만의 표시를 해 놓은 듯 모양도 다르고 형태도 다르다.
별도 없고 달도 없는 하늘이 밝기만 하다. 다른 날 같았으면 자동차 불빛쯤이야 한 입에 삼켜 버렸던 어둠이건만, 오늘 저녁 분홍은 빛을 받아 하얀 포장으로 변한다. 커다란 보자기를 나무위에 올려놓은 듯 선명하다.
손빨래로 널어놓은 하얀 면사포가 이리 펄럭 저리 펄럭하면서 바람에 날려 가더니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추위와 바람에 시달린 몸을 쉬려는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겨우내 답답했던 마음을 떨쳐 버리려는지 세상의 모든 면사포들이 우르르 몰려 나와 여기 저기 머무르고 있다. 송송 구멍이 뚫린 얇은 천들은 사이사이로 하늘이 보이고, 그 좁은 틈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한줄기 바람이 불자 꽃잎이 떨어진다. 잔잔한 호수에서 찰랑대던 물결이 햇빛에 반짝이는 듯 펄렁이며 떨어진다. 꽃비가 내려온다. 커다란 우산을 펼쳐 든 나무 아래로만 내려온다. 면사포에 수 놓여져 있던 꽃잎들이 하나 둘 떨어진다. 너울너울 춤을 추며 떨어지는 꽃비는 내 눈을 현란하게 만든다. 손으로 잡으면 잡힐 듯 하다가도 잡히지 않고, 떨어질 듯 하다가도 떨어지지 않으며 주위를 맴돈다. 내려오는 가 했더니 올라가고, 올라가는 가 했더니 내려오는 꽃비는 나를 어지럽게 만든다. 이 꽃비가 내리고 나면 무늬도 없이 엉성한 씨날줄만 남아 있을 우산을 생각하니 아쉬움이 생겨난다. 바람이 스쳐간 면사포는 아쉬움으로 서러움을 잉태한 것이다. 비를 맞으며 지나가는 내 옷자락에 벌써 봄이 묻어있다.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봄 내음이다. 그러니 굳이 애써 지울 필요도 없다. 한참을 서서 맞아도 무거워지지 않는 꽃비는 참으로 이상한 비다.
짧은 봄 동안 많은 꽃을 보고 싶어 가끔씩 뒤를 돌아본다. 앞만 보고 달려간다면 자꾸만 줄어드는 꽃으로 내게 아쉬움만 쌓이고, 뒤를 돌아보면 늘어나는 꽃들이 나를 아쉬워하고 있다. 나도 줄어드는 꽃보다 늘어나는 꽃들이 더 좋다. 2006.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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