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 캐는 남자
한 호철
지난 휴일에 들녘을 다녀왔다. 일찍부터 내가 부쳐 먹는 논도 없고, 남에게 빌려 준 밭도 없다. 그래서 딱히 정해진 곳이 없지만 가끔씩 그냥 들로 나간다. 한참을 가다가 사방을 살펴보면 인적이 드물고 숲이 우거진 곳 어디에서나 쑥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쑥은 자체의 생명력이 강해 메마른 땅에서도 아주 잘 자란다. 그러므로 경사지고 척박한 땅에서는 다른 어떤 식물보다도 쑥이 먼저 세상구경을 나온다. 마치 겨우내 답답한 땅속에서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지개 켤 날만 기다려 온 것 같다.
그래서 이제 봄이 오는가 싶은 초봄에 푸르른 것은 온통 쑥 뿐이다. 그 이유는 성질 급한 쑥이니 혹시나 눈이 다 녹았는지 추위가 다 가시기 전에 벌써 비시시 방문을 연 탓 일게다.
잡초가 우거진 속 그늘에서도 꿋꿋이 버티니 생명력이 강한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인간 생명을 창조하는 곳에 병이 생기면 우리 조상들은 틀림없이 이 쑥으로 치료하였다. 그리고 원하던 대로 말끔히 나았다.
이보다도 훨씬 전 멀고 먼 옛적에, 미련하기 짝이 없던 곰도 이 쑥을 먹고 사람으로 거듭났다고 하지 않았던가. 쑥은 이렇게 생명의 재생까지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다.
해마다 봄이 되면 나는 쑥을 캐는 날이 종종 있다. 쑥이 마치 오늘이나 내일이나내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러니 나는 쑥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길가에 앉아서 한참동안 쑥을 캐다 보면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시야가 흐려진다. 이쯤 되면 들판은 그야말로 쑥밭 천지다. 그러나 잠시 굽은 허리를 편 후 다시 쑥을 캐려면 손톱만큼이나 작은 것들뿐이다. 처음에는 쑥이라는 이름만 가지고도 반가웠지만 정작 캐려하면 아직 어린 탓이다. 쑥 캐는 일은 이렇게 노동에 속한다.
도란도란 이야기 하며 쑥 캐는 봄 처녀를 찾는다면 도서관이나 미술관으로 가야할 형편이다. 사실은 쑥 캐는 일이 힘이 들기도 하지만 아예 쑥을 캘만한 봄처녀가 없어진지 오래다. 그러기에 내가 자연 속에서 맑은 공기 마시며 흙을 밟고 있다는 것 한 가지만 해도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병들어 누워있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하다. 주중에 일하고 주말에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것도 고마운 일이다. 그렇다면 쪼그리고 앉아 오리걸음 하는 것조차도 불평하지 못하고 부지런히 쑥을 캘 수밖에 없다.
쑥을 열심히 캐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이 쑥은 추운겨울 날씨에도 얼어 죽지 않고 버텨온 생명의 상징이다. 그래서 봄으로 가는 환절기에 늘어난 우리의 심신을 다스려준다. 우리 음식 중 겨울동안 부족했던 비타민을 보충해 주며 신체리듬을 지켜주는 것도 봄동과 달래, 그리고 쑥이다. 이보다 더 귀한 식물은 찾아보기도 힘들다.
온통 말라죽은 잡초더미에서 막 솟아 난 쑥의 밑둥을 툭 따면 튕겨져 나오는 향긋한 내음은 국산 허브의 원조임을 증명해 준다. 쑥향이 허브 중의 으뜸이요, 맛 또한 으뜸이다.
부지런히 캔 쑥은 가족들의 건강 지킴이가 된다. 그러고도 남는 것은 내 것이다. 이렇게 많이 캘 줄 알았더라면 지난겨울에 지푸라기라도 덮어 주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도 든다. 그랬더라면 좀 더 부드럽고 굵은 쑥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쑥을 그냥 일반 쑥이라 부른다. 그래서 보통 쑥은 전도 부쳐 먹고 떡도 하고, 국으로 끓여 먹기도 한다. 때로는 찹쌀, 소금, 곶감, 대추, 깨 등을 넣고 쑥버무리를 만들기도 한다. 약간의 가공을 더한다면 밀가루를 묻힌 뒤 튀김가루를 입힌 쑥 튀김도 있다.
이렇게 만든 여러 가지 음식 중에서도 쑥의 제 맛은 쑥국에서 나온다. 콩가루나 들깨가루를 넣은 된장 쑥국이 기중 최고다. 전통의 최고 발효식품과 자연이 준 무공해 약초가 만났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쑥 캐는 시기가 조금만 지나도 그냥 먹기는 입맛이 영 내키지 않는 때가 있다. 이때부터가 약쑥으로 구분되는 시기다. 이쯤 되면 쑥을 하나씩 둘씩 캐는 것보다는 줄기 채 뽑아서 다듬는 것이 낫다. 이것들은 살짝 데쳐서 말린 후 가루를 내어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 때 뽑아진 뿌리는 간단히 묻어두면 내년을 기약할 수도 있다. 이른 봄 부지런한 사람에게 자연이 주는 선물의 씨를 말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쑥을 캐면 오늘 저녁 반찬이 한 가지 늘어난다는 생각에 즐겁다. 저 쑥을 마저 캐면 내일 아침 식탁도 풍성해질 것을 생각하니 기쁘다. 그 보다 더 큰 기대는 가까이 있는 사람의 건강이 좋아 질 거라는 것이다.
햇볕이 따갑고 일 년 중 자외선이 가장 강하다는 봄이어도 상관없다. 오히려 쑥이 있는 봄이어서 더 좋다. 나는 이렇게 쑥을 캘 만큼 건강하지 않은가. 손에 쥔 비닐봉지가 부풀어 오를수록 마치 둥그런 보름달을 보는 것 같다. 그 속에는 건강한 미소가 담겨져 있다. 내가 들고 있는 봉지 속에 쌓이는 것은 쑥이 아니라 가족의 건강과 사랑인 것이다. 내가 뜯은 이 쑥으로 가족들이 건강해진다면 얼굴이 그을리는 봄 날,오늘이 고마울 뿐이다.
도심을 벗어나 자연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만 해도 건강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다가 흙을 밟고 하루를 지낸다면 이는 느림의 미학이 더 해질 것이다. 긴장의 일상이 아닌 다른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자연에서 받는 최상의 혜택일 것이다.
이러한 모든 혜택을 받고 있는 나는 가족들을 헤아려본다. 이 쑥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나는 쑥 캐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다. 자연의 귀중함도 알고 쑥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 자연은 우리의 생명도 연장시켜주며,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사람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안전을 지키는 사람들 2004년 12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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