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물로 대접하고 있는가.
길가 가로수로 서 있는 벚꽃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였다. 마침 내일이 토요일인데 오늘 강한 비바람이 예상된다는 기상관측이 있었다. 혹시나 오늘 부는 비바람에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가 떨어지면 내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망을 할까 걱정된다. 그런데 낮 동안 해가 따사롭게 비추고 바람도 잔잔하다. 봄에 꽃구경도 못하나 싶었었는데 이 얼마나 다행인가. 바람이 불어서 꽃이 떨어지면 꽃구경을 못하는 사람이 서운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다른 지역에서는 봄 가뭄에 여러 사람들의 애가 탄다고 하는데 얼마나 심하면 사람의 애가 다 타들어 갈까생각하니 말하기조차 참으로 조심스럽다. 우리 마을은 그래도 그런 정도는 아니라서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가뭄이 들어 물이 모자라면 한 줄기 물이라도 더 끌어들이려 싸움까지도 불사한다. 그리고는 단 한 방울의 물이라도 귀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물이 풍부한 곳에서는 한 동이의 물도 귀한 줄 모르며 물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다.
벚꽃이 가로변이 아닌 울타리 안에서 피지 않는 것은 나무가 크고 빨리 자란다고 담장 안에 심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연유에서든 길가에는 오래 전부터 심고 가꾸었기 때문에 해마다 꽃도 피고 낙엽도 지는 것이다. 벚꽃이 분홍색을 띠는 것은 잎이 분홍색이 아니기 때문이며, 벚꽃의 색이 잎의 색깔과 같다면 꽃의 색이 분홍이 아니라 잎의 색깔을 분홍이라고 말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벚나무의 꽃이 잎보다 먼저 피는 것은 잎이 꽃보다 늦게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꽃이 피면서 잎이 동시에 나온다면, 꽃이 먼저 피는 것이 아니라 잎이 먼저 나오는 식물이라고 하여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세상에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구름이 있어야 비가 오고, 비가 와야 땅이 젖는 것이다. 어느 곳에서 가뭄이 들어 한발이 계속되면, 다른 어느 곳에서는 장마가 지고 홍수가 나는 곳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세상은 항상 상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창 물이 부족할 때에 비가 오지 않는다면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다. 이때 마음대로 구름을 불러다가 비를 내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비가 오는 것도 상대적이듯이, 오지 않는 비를 오게는 하지 못한다면 반대로 때맞춰 내려온 비를 흘러가지 말라고 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생각해 본다.
길가의 벚나무가 큰 것은 울안 개나리의 키가 작은 데서 알 수 있다. 만약 쉐콰이어나 전나무 또는 삼나무처럼 키가 큰 나무들만 있다면 벚나무는 키가 큰 축에 들지 못하는 작은 나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벚나무가 키가 큰 것은 작은 개나리가 있기 때문이며, 벚꽃이 분홍인 것은 개나리꽃이 노란 색이기 때문이다. 벚나무가 태양을 독차지 하고 싶다며 가지를 넓게 펼칠 때, 그 그늘 밑에서 잘 견뎌주던 개나리가 있었기에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늘 속에 있던 개나리가 햇빛을 보고 싶다면 길게 뻗어있는 벚나무 가지를 잘라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개나리꽃을 보고 싶은데 벚꽃도 보고 싶다면 막무가내로 가지를 잘라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리저리 보아 가면서 벚꽃의 전체적인 균형도 살피고, 나무가 살아 갈 수 있을 만큼의 가지는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늘 속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개나리의 입장을 무시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양과 음의 조화인 것이다. 여기서 만약 어느 한 쪽도 양보할 수 없는 형편이라면 둘은 헤어져서 멀리 떨어져 심어 놓아야 할 일이다. 이것이 바로 상대방을 위한 배려인 것이다.
며칠 전에 물의 날이라고 하며 지나갔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주변에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무수한 요소들이 있다. 그중에서는 우리의 생사를 결정할 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들도 많다. 2분만 없어도 바로 영향을 미치는 공기가 그렇고, 우리 몸의 영양을 책임지는 주식성분이 그렇다. 항상 달고 다니면서 마시는 커피, 담배 등도 가까이에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유독 물만은 특별한 날을 정해두고 기리며 뒤돌아보고 부산을 떨고 있다. 그만큼 더 가까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한다. 도대체 물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글쎄 잘 모르기는 해도 확실한 것은 물은 우리 몸의 체중을 80%나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많이 있는 중에도 2%만 부족해지면 생명에 위협을 느낀다. 정말 우리 몸의 아주 중요한 구성분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물이 우리에게 이렇게 중요한 성분이라면 평소에 잘 거두어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평소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가 우리 몸속에만 들어오면 관리를 잘 해야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물이 밖에 있으나 우리 몸 안에 있으나 성분이 변한 것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 딱딱하게 굳어서 변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가 겉과 속이 달라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 물인데 우리는 너무나도 달리 대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물을 더럽힌다면 다른 사람은 그 더렵혀진 물을 만나야 하는 것이 세상 이치이다. 그러나 주변에서 만나는 물이 더럽고 변질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먹는 경우에는 어느 누군가가 물을 깨끗하게 변화시켜서 먹어야 한다. 이 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각자 마실 물을 각자가 깨끗하게 변화시켜서 마신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우리들은 안쪽 호주머니에 또는 바지 주머니 뒤쪽 어디에 자그마한 정수기를 달고 다녀야 하는 수고를 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도 자그만 생수병을 들고 다니면서 마시는 일이 빠르게 확산되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들고 다녀야 할 것이 많기도 한데 거기다가 정수기나 생수병까지 들고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니 부담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이 생수병에 대해서는 귀찮아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든지,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잘 못된 일이다. 그 일은 바꾸어 말하면 내 주위에 흘러 다니는 물은 비록 오염되어 있어도 상관이 없으며, 내가 마실 물만 깨끗하게 정화되어 있으면 된다는 사고가 팽배해 있다는 결론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앞에 언급한 음과 양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가 마실 물만 정화시키려 한다면, 다른 사람들도 자신이 마실 물만 깨끗하게 하려 할 것이고 남의 물에는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든지 상관만 하지 않아도 고마운데 하다보면 방해를 한다든지, 정화를 시키는데 어렵게 한다든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일부러 훼방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만을 생각하다보면 남에게는 피해가 되든 말든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면 정화시키는 비용이 결국은 나에게로 증가한다든지, 내가 들고 다니는 작은 정수기로는 도저히 정화가 불가능하다든지 하는 문제가 발생하고 만다. 이것이 내가 치러야하는 사회에 대한 책임이며 의무인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 또한 진리이다. 나를 둘러 싼 주변 환경에 대하여 나는 평소에 신경 쓸 일도 없고,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일쯤으로 생각한다면 돌아 올 일은 고통과 슬픔의 연속일 것이다.
평상시 가까이에서 조용하고 얌전히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고마워하여야 할 것이 바로 물이다. 그러나 물을 물로 여기지 않고 필요 없는,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자세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물을 더 이상 물로 대하지 않을 때 물도 우리를 물로써 대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때는 벌써 홍수가 되고 해일이 되며 사태가 되어 우리를 해치게 되는 것이다. 어느 누가 감히 고요한 물이 사나운 물로 변하도록 주문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가까이 있는 물을 물답게 대하면서, 나의 갈증을 해결해 주는 것은 오직 물뿐이며, 지금도 내 몸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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