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보아서 좋은 것/잡다한 무엇들

이 태준소설의 주인공 성격비교

꿈꾸는 세상살이 2006. 5. 6. 20:46
 

이태준의 ‘꽃나무는 심어놓고’와 ‘촌뜨기’를 읽고

   작품의 줄거리를 자세히 적고 주인공의 성격을 비교하기


 

              =  차       례  =


        I.  서론   


        II. 이 태준의 생애 


        III. 작품의 주요 줄거리


            1. 꽃나무는 심어놓고 


            2. 촌뜨기    


        IV. 두 작품의 공통점   


        V. 작품에 나타난 주인공의 성격비교


            1. 겉으로 나타나는 성격 

  

            2. 환경을 극복하고 대처하는 부분


            3. 가족을 위하는 방법  


            4.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   


            5.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결단력  

 

            6. 일을 처리하려는 적극성 



        VI. 결론   





 I. 서론


이 태준은 1930년대 우리 문학사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상허는 해방 후 월북을 하여 남한 문학사에서 좋지 않은 이미지를 남겼으나, 1980년대 말에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늦게나마 빛을 보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작품들이 그렇듯이 그의 작품 역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일제 말기 농민들의 수탈현장과 일시에 들이 닥친 제도의 변화는 기존 생활방식에서 아주 다른 세계로 몰아가는 정책으로만 비쳐지고 있었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대안도 없을뿐더러, 고향을 떠나 장돌뱅이나 타향살이를 한다는 것은 인생의 막장에서 선택하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이 겪은 어릴 적 가난과 고향을 떠난 방황은 이 후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그의 작품 중 '꽃나무는 심어놓고‘와 ’촌뜨기‘를 읽고 주요 내용과 주인공들의 성격에 나타난 작자의 의도를 알아보기로 한다.


 II. 이 태준의 생애


상허 이 태준은 1904년 11월 4일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신명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 문교씨는 철원공립보통학교의 교관이었으며 덕원부 감리서의 주사를 지냈던 지역 지식인이었다. 1909년 식구들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이사하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그해 여름에 35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자 다시 귀국길에 오른다. 귀국도중 함경북도 이진에서 어머니 안씨는 태준의 여동생 이 선녀를 낳고 정착하였으나, 3년 뒤인 1912년 어머니마저 사망한다.

태준은 고향인 철원의 용담에서 친척집에 맡겨지면서 한자를 깨우치고 당시를 통하여 문학을 알게 되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상급학교인 간이 농업학교로 진학하였으나 책값과 입학금을 낼 수가 없어 고향을 떠난 후 원산에서 객지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일하는 도중 외할머니를 만나 인생의 설계를 한 후, 1920년 배재학당에 합격하였으나 역시 돈 때문에 입학을 포기한다. 다시 야학에서 세계관과 인생관을 세운 후, 다음 해 4월 휘문학교에 입학한다. 여기서도 돈 때문에 고생하였으나, 상허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작문으로 그의 작가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23년 ‘휘문’ 창간호에 처음 글을 싣게 되었지만, 1924년 6월 13일 동맹휴교사건의 주모자로 퇴학을 당한다. 1925년 도쿄에서 ‘오몽녀’를 집필하여 ‘조선문단’에서 입선을 하고, ‘시대일보’ 7월13일자에 발표하게 되니 작가의 첫출발이 된 셈이다. 1926년 일본 상지대학에 입학하였으나 1927년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1929년 잡지사 ‘개벽’ 에서 생활전선으로 본격 나서고, 1930년 이 순옥과 결혼을 하여 한 가정을 이룬다. 

1931년 조선중앙일보에 근무하게 되면서 안정을 찾아 장편소설이 등장하게 되고, 1932년부터는 아주 많은 단편도 발표하게 되었다. 1930년 이후 주로 남녀간의 애정을 다룬 소설을 썼으나 1940년부터는 친일성격의 작품이 등장하였고, 1942년에 친일의 상징인 제2회 조선예술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친일 작품에 미온적이고 소극적이었던 것은 자의가 아닌 세태의 요구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45년 해방 후 조선문학건설본부에 가담하는 변화를 보였고, 민족의 서정적 정서를 표현하던 단편소설이 아니라 미래를 투시하는 역사적 서사시의 문학관을 앞세워 문학동맹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개인적인 일상의 작품에서 거족적이고 대국민적인 자세로 전환한 것은 일대 변화였다. 그러나 사상가로서의 자신의 뜻을 다 펴기도 전에 1946년 홍 명희와 함께 월북을 하게 된다.

월북 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부위원장을 지낸 상허 이 태준은 한국전쟁시에  종군작가단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다녀 온 것으로 알려졌고, 9.28 수복시 남한군에 귀순의사를 전해 오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북한에서의 이 태준은 1954년부터 사상검증에 들어갔으며, 1955년부터는 본격적인 비판을 받다가 1956년 10월16일 결국 추방되었다. 그 후 공장 노동자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생사에 관하여 전해지는 게 없다. 월북 후의 작품이 아주 미미한 것은 1930년대의 많은 단편들과 비교하면 그의 주된 사상이 무엇이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게 한다.

상허의 초기 작품들은 자신과 주변 환경에 대하여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거기에는 본인의 자립심이나 독립심이 엿보이며,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결백증과 같은 면을 보이기도 한다. 환경을 탓하여 비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신의 처지에 대한 원인과 시시비비를 따져 원망하지고 않고 담담히 헤쳐 나가려는 의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후 작품에서는 그런 면이 보이지 않는다. 본래 작가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대적인 조류에 따라 흘러가던 한 줄기 흐름을 잘못 걸러 탄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하게 한다.   


III. 작품의 주요 줄거리


 1. 꽃나무는 심어 놓고


1933년 3월 신동아에 발표된 작품이다. 이 단편은 1934년 7월 ‘달밤’이라는 첫 번째 단편집에 수록되어 있으며, 일본어판인 1941년 8월의 ‘복덕방’이라는 책에 실려 있다. 또 1947년 5월에 나온 ‘복덕방’이라는 우리말 책에도 실려 있는 글이다. 이 소설은 일제의 경제적 수탈을 견디다 못해, 고향을 등지고 무작정 상경한 방서방과 그 의 아내, 그리고 어린 딸 정순이 서울에서 겪은 사회 현실과 자신들의 어려운 세상살이 이야기가 펼쳐진다.


방서방은 고갯마루에서 자기 살던 집을 바라다본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핑그르르 돈다. 겨우 5리 밖에 떨어지지 않은 집은 고개에서 빤히 내려다보이며 연기가 내비치면 밥을 짓고 있음을 알고, 널어놓은 아내의 치마까지도 볼 수 있는 그런 정겨운 집이었다. 그런 집을 아내와 같이 떠나려니 감회가 새로운 것이다. 바람도 자고 가는 아늑한 곳이었으며, 개울이 흘러 물 걱정이 없는데다 뒷산에서는 언제든지 땔감을 해다가 겨울을 날 수 있는 그런 마을이었다. 식구라야 겨우 세 명인 방서방네가 짐 보따리를 이고 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고개를 넘자 새로 난 신작로는 그들을 미지의 세계로 안내하는 길잡이가 되었다.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가야만 하는, 돌이 킬 수 없는 길이 된 것이다.

방서방네가 길을 나선 것은 순전히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몇 대나 조상 때부터 김진사네 땅을 부쳐 먹고 살아왔으나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김진사 당대에는 땅에 대한 세를 받지도 않았으며, 사후에 김진사 아들도 혹시 집안에 혼상 등 행사라도 있으면 세를 깎아주던 위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마음씨 좋던 김의관이 일본인 지주에게 땅을 넘겨 준 뒤로는 사정이 달라졌다. 세를 올려 받는 것은 물론이며, 비료를 대주고 가을에 비싼 이자로 받아가고, 별의별 명목의 세를 받아가니 처음 듣는 이름뿐이었다. 이러니 농사를 지으면 늘어나는 것은 빚뿐이라 가산을 팔아도 빚을 갚기에 부족하였다.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게 되어 모범촌이 폐촌으로 변할 지경에 이르자 군에서는 때 아닌 걱정이 생겼다. 대책으로 사쿠라 나무를 나누어주고 심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내년 봄에 꽃이 피면 아주 보기 좋고 살기 좋은 마을이 될 것이라고 다독거렸다. 사람들은 자기가 심은 나무가 잘 자라주고 내년 봄에 꽃이 피는 것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선 먹고사는 것이 더 급한지라 소리 소문없이 마을을 떠나고 있었다. 원래가 천성이 착하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이들로서는, 새생명의 잉태와 봄부터 가을까지의 자연현상 모두가 생활의 일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머니의 품과도 같은 고향을 떠나는 아픔보다 더 급한 것이 있었던 것이다.

엄동설한에 사흘을 걸어 서울에 도착하였으나 지친 몸뚱이 하나가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집을 팔아 몇 원을 쥐고는 있었으나 언제 어떻게 쓸지 몰라 허투루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방서방네는 어쩔 수 없이 이름도 모르는 다리 밑에 짐을 풀었다. 거적을 치고 냄비를 걸었다. 물도 길어오고 나무도 사 들였다. 다리 밑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방서방은 눈치우기를 하거나 지게 품을 팔거나 무슨 일이든 하고 싶었으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다. 아내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이에게 젖이라도 물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으나 마땅히 일할 것도 없는데다가, 길을 몰라 그나마 거처에 돌아올 수 있을까 걱정이 되어 꼼짝도 못한 체 일주일이 지났다.

견디다 못한 아내가 새로 탄 후 한번도 무엇을 담아 본 적이 없는 새 바가지를 가지고 밥을 얻으러 나섰다. 모든 집이 부잣집같이 보였으나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이것도 쉽지 않았다. 식은 밥 더운 밥 가리지 않고 겨우 한 바가지의 밥을 얻었을 때는 이미 돌아 올 길을 잃어버린 뒤였다. 길을 잃고 헤매던 아내 김씨는 인신매매단 노파에게 속아 팔려 나간다.    

한편 아내를 기다리던 방서방은 어린 것을 놓아두고 달아 난 아내를 원망하며 분해 하였다. 그런 후 이틀이나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아이에게 되는대로 얻어 먹이게 되었다. 하지만 어린 것은 먹지 못해 속이 졸아 붙은 뒤에, 먹을 것 못 먹을 것 가리지 않고 먹은 관계로 그만 병이 나서 죽어만 간다. 그러나 돈이 없어 여기저기 병원에도 가지 못하게 되자, 다시 집을 나간 아내를 원망하며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아이에게 화풀이 하게 된다. 그러다가 제 정신이 들기도 하였지만 불덩이 같이 끓던 아이 정순은 이미 체온이 식어가고 있었다.  

힘들었던 겨울이 가고 봄이 되자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 그 속에서 아내를 떠 올리고 연민의 딸이 생각났다. 거기다가 지난 가을 자신이 심어 놓은 고향 뒷산의 사쿠라 꽃이 아른거렸다. 과거의 고향마을과 단란했던 가족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어느 날 수중에 돈이 들어오자 단골집에 들러 거나하게 술을 마셨다. 그리고는 늙수그레한 주모와 농담까지 하였다. 술에 취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즐겁게 느껴지지만 술을 깨면 세상은 견디기 힘들게 슬프다. 아무데나 주저앉아 그냥 울고만 싶은 심정이다. 남에게 비위를 맞추어주는 주모의 삶 속에 아내의 삶이 있고, 그런 아내의 곁에는 비참한 자신 방서방이 있었기 때문이다.


  2. 촌뜨기


1934년 농민순보 3월호에 발표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항이며, 1934년 7월에 발간된 ‘달밤’에 수록되어 있으며, 1939년 12월 ‘이태준 단편선’에 실려 있다. 또 1941년 8월 일어판 ‘복덕방’과 1947년 1월에 간행된 한글판 ‘해방전후’에도 실려 있다. 화전으로 밭을 일구며 숯을 굽는 등 자연을 이용하여 생계를 이어가던 장군이는 금하고 있는 산짐승 잡이 함정을 파 놓은 일로 유치장 생활을 하고 나온다. 결국은 벌이수단이 없어져 고향을 등지게 되는 자신에 대한 서러움과 아내에 대한 애절함을 표현하고 있다.


장군이 스무날을 유치장에서 지내고 나오게 되었다. 유치장에 있을 때는 철떡 같이 먹었던 결심들이 그사이 흘러가 버린 시간들로 힘없이 허물어지고 만다. 그간 운동부족으로 다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으며 벌써 머루 다래가 끝물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면사무소를 지나는데 놋으로 만든 주발이며 대접, 국자 등을 팔고 있었다. 귀한 물건 싸게 판다는 말에 촌사람들은 신기한 듯 솔깃하여 모여들었다. 그러나 장군이 생각할 적에는 놋쇠 그릇이 서민들에게는 전혀 쓸데가 없는 그런 사치스런 물건으로 보인다. 그런 까닭에 자신이 사지도 못할 그릇은 남들도 사지 못하게 훼방을 놓아 흩어 버렸다. 하긴 따지고 보면 사용할 일도 없이 모셔놓았다가 빚으로 나갈 물건이라면 그의 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었다.

장군이 살고 있는 마을은 안악골로 하늘아래 첫 동네이지만 대대로 화전과 숯을 구워 먹고 살아왔다. 거기다가 철마다 수확하는 열매며 나물 등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부지런만 하면 비럭질하지 않고 그냥 먹고 살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큰 회사가 산을 산 뒤로는 이러한 모든 일들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안악골 사람들은 항상 범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장군이 유치장에 있는 동안은 주는 밥에 잘 먹고 몸뚱이는 편하게 지냈으나, 막상 나오게 되니 집안이 걱정이 되었다. 아내는 잘 있는지, 집에는 무슨 일이 없는지 앞선다. 하지만 막상 집이 가까워지자 다른 한 가지 딴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 아내는 젊고 토실토실하며, 게다가 예쁘기도 한데 자신의 아내가 가장 못나고 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때는 차라리 없어져 주었으면 하는 맘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는 사이 안악골 입구 방앗간에 닿았다. 이 방앗간은 장군이가 만든 것이다. 일본회사가 산을 산 뒤로 산에서 나는 물산을 마음대로 취하지 못하도록 하자 장군이도 그 말을 따른 것이다. 그래서 새로 시작한 것인데 빚을 마흔 냥이나 얻어 목재도 사고 목수 품을 들여 거의 완성단계까지 이르렀다. 여름내 보퉁도 내고 돌담도 이미 다 쌓아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발동기를 사들고 들어 온 사람이 있었으니 이제 물레방앗간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남은 것은 빚뿐이었다. 안악골에서 장군이네가 살아 갈 방도가 없어보였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장군이처가 이틀이나 울어대더니 할 수 없이 장군이를 따라 나선다. 마을 사람 몇이서 배웅을 할 뿐 말이 없다. 장군이는 속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애써 감추면서 태연한 척한다. 모질어야 산다. 나나 하니 떠나 보기라도 한다. 너희들은 얼마나 견디나 보자 하면서 자신을 위로해 본다. 농사 밑천이나 마련하면 반드시 찾아 가마고 약속하며 나선 길이다. 울며불며 헤어지지 않으려는 아내를 어르고 달래서 친정 김화로 보내는 일은 내 발걸음을 떼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헤어져 걸어가는 아내는 자꾸 뒤를 돌아보지만 장군이는 애써 모른 척하였다. 두 사람이 가는 길은 서로 달랐지만 가는 방향은 5리나 같이 나 있어 고개만 돌리면 서로 바라다 보이는 길이었다. 이제 마지막 고개만 넘으면 서로 보이지 않게 되는 그런 길목에 서서 아내를 불렀다. 작년 겨울부터 이차떡 노래를 불러댔으며, 연 이틀간이나 곡기를 끊고 울어대던 아내를 생각하니, 읍내에서 떡이라도 사 먹이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다. 아내는 혹시나 친정으로 가지 말라는 말이라도 하려는 줄 알고 눈에 광채를 보이며 허위단심 달려왔다.

떡이라도 먹고 가라는 말에 아내가 실망을 하였지만 장군이의 마음을 받아들인다. 거기다가 객지로 떠나면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아내 손에 쥐어주는 열 냥은 아내를 더욱 슬프게 만든다. 시장에서 헤어진 아내는 남편을 돌아보느라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였고, 남편 또한 길 한가운데 서서 넋을 잃고 멀어져 가는 아내를 바라보기만 한다. 그러는 중 자전거가 장군이를 들이 받는다. 얼떨결에 어린 아이 급사에게 뺨까지 쳐 맞고 멍 하는 사이 아내의 그림자도 모퉁이를 돌아서 가버리고 더 이상 찾아 볼 수가 없다.


IV. 두 작품의 공통점


방서방과 장군이는 고향에 살면서 그냥저냥 먹고 살아가는 농부였었다. 그들은 자기 땅이 없는 소작농이거나 화전 등 자연을 이용하여 살아가는 어려운 처지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지주가 바뀌고 삼림의 재산권 행사가 들어오자 생활의 터전을 잃어버린 주인공들은 고향을 등지게 된다. 평소 모아놓은 재산도 없고, 가솔도 많지는 않았지만 당시 한 입은 아주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고향을 떠나 객지로 간다는 아주 큰 모험을 하게 된다. 손에 쥔 것은 집과 가재도구를 팔아 만든 몇 원이 전부인 가난한 사람들이다. 이 소설들은 당시 우리 사회의 현실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고 본다.

일제의 경제적 수탈을 견디다 못해 고향을 등지는 우리 현실이며, 농촌이 갈수록 피폐해지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방서방이 마당가나 마을 뒷산에 사쿠라를 심어 놓은 것이라든지, 장군이가 아내를 데려가지 않고 친정에 놓고 가는 모습은 아직 고향에 대한 향수가 한 가닥 남아 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언제든지 다시 찾아오고 싶은 그런 향수를 느끼지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제의 강요로 인하여 우리의 문화가 무너져가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V. 작품에 나타난 주인공의 성격비교


  1. 겉으로 나타나는 성격


‘꽃나무는 심어놓고’의 방서방은 내성적이면서 착실한 농군이다. 군청에서 심으라고 나누어 준 사쿠라 나무를 열심히 심어 놓고 그 해 겨울에 고향을 떠났다. 가을에 수확하여 먹을 것도 없는데, 겨울을 나고 봄부터 또 가을걷이 때까지 견뎌야 할 배고픔을 생각하면 한숨만 나올 것이다. 그래도 시키는 대로 나무를 심었다. 물론 이것이 고향을 떠나야겠다고 먹은 마음을 숨기는 방패가 되었는지는 모르나 고분고분 말을 다 들었다. 그러면서 조용히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그러나 ‘촌뜨기’의 장군이는 외향적이면서 착실한 농군이다. 그가 산골에서 화전을 하고 숯을 굽지만, 본디 천성이 악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한 방편으로 택했던 것들이었다. 또한 그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러나 환경이 바뀌면서 일절 금하게 되자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하여 노력하는 면이 보인다. 


   2. 환경을 극복하고 대처하는 부분


방서방은 수확은 일정하지만 농지세가 많아지고 각종 지출이 많아지면서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여기에서 다른 논을 더 소작하려 한다든지 아니면 개간을 하여 자신 소유의 땅을 늘리려 한다든지 하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그냥 주어진 환경에서 주어진 대우를 감당하다가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자 고향을 떠나는 방법으로 해결하려한다. 

한편, 장군이는 불법인줄은 알지만 그래도 먹고 살기 위한 호구지책으로 짐승 잡이용 함정을 파 놓았다가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물론 이 방법이 옳았다는 것이 아니라 대처 할 수 있을 때까지는 대처하면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아야 하지 않느냐하는 생각에서는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수렵이나 삼림훼손, 화전 등을 못하게 하자 빚을 내어 전혀 다른 분야의 물레방앗간을 만들 계획을 세운 점 등을 보아도 알 수 있다. 


  3. 가족을 위하는 방법


방서방은 아내와 함께 한 겨울에 타향으로 떠난다. 그것도 생면부지 대처 서울로 떠난다. 더구나 가진 것도 없으면서 먹어야 할 입은 셋이나 되는데 뚜렷한 직업도 없이 길을 나선다. 서울에서의 다른 대책도 없이 열심히만 하면 될 것 같은 생각으로 일을 저지르고 보는 성격이 나타났다. 지금 당장이 어렵고 힘들다고 하여 가족들을 담보로 대안이 없는 모험을 한 것이다. 가족이란 원래 고생과 낙을 같이 누리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렴 자기 가족에게 고생을 시키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방법의 차이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 결과 방서방네는 모두 흩어지는 불행을 겪는다.

그러나 장군이는 고향을 떠나는 방법이 조금 다르다. 머루 다래가 여물어가는 가을에 고향을 떠났다. 부족하지만 그래도 어디에 가더라도 먹을 것을 얻어라도 먹을 수 있는 그런 계절인 것이다. 거기다가 겨울이 닥치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하면 한 겨울 추위가 오기 전에 대비도 가능한 것이다. 모든 것이 생각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다가 잘못되면 최소한의 돌파구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아내는 친정집에 보내고, 장군이는 어딘지는 모르나 돈을 벌러 떠나는 것이다. 혹시 실패를 하여도 장군이만 건강히 돌아오면 다행인 셈이다.   


  4.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


방서방이 아내를 위하여 해 준 것이 하나도 없다.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아내의 옷을 사준 것도 아니고, 먹고 힘을 내라고 연명할 것을 가져다 준 적도 없다. 가진 것이 없으면 얻어서라도 먹여야 하였지만, 딸아이를 위하여 자신이 밥을 얻으러 나간 때는 이미 시기가 늦은 판단이었다.

장군이는 평소 아내가 못생긴 얼굴을 하였다고 못마땅해 하였다. 물론 대놓고 얘기한다든지 직접 구박을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남의 처와 비교하여 내심 미워하고 없어지면 새 장가를 들 구실이라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혹 다시는 못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작년 가을부터 먹고 싶어 하던 이차떡을 사 먹인다. 자신이 가지고 가서 기반을 잡는데 보탬이 될 그런 돈을 사용하고, 거기다가 넉넉하지는 않지만 요긴하게 쓸 수 있도록 돈을 쥐어 주었다. 


   5.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결단력


방서방의 아내가 밥을 얻으러 갔다가 길을 잃었을 때 방서방은 바로 길을 찾아 나섰어야 하였다. 정해진 곳 없이 헤매기는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래도 혹시 어디선가 만날지도 모르는 그런 기회마저 얻지 못했다. 아내가 어떻게 된지도 모르는 체 이제나 저제나 아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사리판단력이 부족한 것을 보여준다.

장군이는 겉으로는 미워하는 아내지만 그래도 아내는 아내라는 생각을 하였다. 자신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며, 혹시 오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따른 위기감을 느꼈다. 그리하여 마지막 길모퉁이를 돌기 직전에 아내를 찾아 부른다. 늦었지만 그래도 단 한 번 남은 기회를 잃지 않고 미리 가서 기다리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것이 아내와 장군이의 갈등을 해소하거나, 이산가족의 원인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위로해 주는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6. 일을 처리하려는 적극성


방서방의 아내가 밥을 얻으러 나간 후 이틀이 지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자, 방서방이 아이를 들쳐 업고 나섰다. 되는대로 밥을 얻어 먹이니 아이가 체하고, 여러 날을 굶어 영양실조에다가 병을 얻어 숨이 잦아 들어간다. 그때 방서방이 병원에 데리고 가지만 너무 늦었다고 야단이나 맞을 뿐이며, 큰 병원에 가보라고 혼쭐이 난다. 그러나 어차피 큰 병원에 갈 형편도 안 된다면 작은 병원에서라도 매달리며 치료를 해 달라고 사정이라도 해 보았어야 했다. 딸이 죽어 가는데 자신의 힘으로는 살릴 방법이 없으니 어떤 방법이든지 노력은 해 보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너무 잘 아는 방서방은 용기도 없고, 대책도 없으며, 노력도 없이 그저 신세한탄만 하고 있었다.

장군이는 아내와 마지막 헤어지기 전 길모퉁이에서 아내를 불렀다. 길이 고르지 못하여 움푹움푹 드나드는 아내의 그림자만 보일 뿐이다. 장군이는 담장위에 올라서서 아내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래도 둘의 사이가 멀어 여의치 않자 들판에서 일하던 농부들이 장군이를 대신하여 아내를 불러준다. 자신이 불러도 들리지 않을 거리의 아내를 위하여 돌 담 위까지 올라가는 성의를 보인 것이다. 그런 성의를 보이자 옆에서 일을 하던 농부들도 장군이를 측은하게 생각하여 그를 도와주게 되었던 것이다. 


VI. 결론


상허가 쓴 작품 중 ‘꽃나무는 심어놓고’‘와 ’촌뜨기‘를 읽으므로 우리과거의 아픔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이 작품들은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 억압받던 시절이기는 하였지만 상허 이 태준은 개인적으로도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그런 작가가 쓴 소설이 자신의 대변일 수도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당시 우리 민족의 대변이라고 보아진다.

조상 때부터 소작이나 남의 품일로 먹고 살던 농민들은 항상 종과 같은 자세로 살아왔고, 지주나 관리들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 이유는 자기들의 밥줄을 쥐고 있는 관계로, 그 굴레에서 헤어나는 별도의 길을 갖고 있지 못한 경우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여기 고향을 떠나는 농민들의 심정이나, 살아 갈 길이 막막하다고 하면서도 다른 길을 찾지 못하는 농민들의 심정은 매 한가지다.

이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우리가 찾아나서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우리의 살길일 것이다. 남아 있어도 죽게 되고, 가면 죽게 될지도 모른다면 어떤 변화를 주어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일제 말기에 쓰여 진 소설 중에 주인공의 적극적인 대처와 소극적인 대처의 내용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러한 사건이 과거 강점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시시각각으로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지금이 그 적기인지 아니면 좀 더 기다려야 하는지 판단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러나 제때에 내린 판단, 그것도 옳은 판단은 우리 생활에서 아주 긴요하게 쓰여 질 것이다. 우리 인생의 갈림길을 좌우하는 그런 만큼의 무게로 다가오는 판단은 항상 시의 적절한 결단력을 필요로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