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면 /한 호철
지난 5월1일은 완주군의 대아수목원에 다녀왔다. 일상이 단조로워지면 들과 산으로 꽃과 나무, 그리고 자연을 벗 삼아 떠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오늘 찾은 이 수목원은 가까이 있으면서 꽃도 많아, 사람들이 자주 찾아다니는 곳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온 산에 진달래가 피었다가 지고나면 이내 철쭉이 뒤따라온다. 여기 수목원에도 철쭉과 영산홍이 아주 많아 제철이 되면 온통 붉은 빛으로 흐드러진다. 그래도 자연의 조화 속에 어느 봄날은 4월 말에도 활짝 피는가하면, 어떤 때는 5월 중순경에 꽃이 핀 적도 있었다. 올 해는 꽃철이 약간 늦게 온다고 하여 별 기대도 하지 않고, 그냥 가벼운 등산이나 하자고 나선 곳이 바로 대아수목원이었다.
평상시에는 주차장에서 걸어 들어가는 길가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어떤 꽃이 피어 있는지 별 관심도 없이 지나다녔지만, 오늘은 아내와 둘이서만 가는 나들이였기에 그런지 여기저기 눈에 보이는 것도 많다. 크고 작은 꽃들과, 많고 적은 무더기를 이루어 아담하게 꾸며놓은 테마공원이 있고, 영내 안내도도 눈에 들어온다. 이 커다란 그림지도는 언제부터 여기 서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제도 그저께도 아마 그보다 훨씬 전부터 그대로 서 있었으리라. 약간 색이 바랜 듯 한 곳하며 간혹 페인트가 벗겨진 곳이 그 연륜을 말해 주는 듯하다.
다리를 건너자 바로 작은 팻말이 나오는데 오른쪽에는 금낭화 자생군락지가 있단다. 아무 생각없이 그냥 직진하여 평상시 다니던대로 영내로 향한다. 거기서 작은 다리를 건너면 안내소도 있고, 화장실과 식수원도 있으며, 바로 눈앞에 꽃무더기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오늘은 처음 만나는 안내도가 알려준 대로 제3봉을 향해 오른쪽 등산로로 접어든다.
내가 택한 제3봉으로 가는 등산로 역시 처음길이다. 그런데 들어서자마자 바로 급경사로 이어진다. 갑자기 숨이 막히는가 싶더니, 종아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가파른 길로 인하여 발목이 너무나 휘어지는 관계로 겨우 100m 도 못가서 장딴지 근육이 무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서서 뒤로 걸어 갈 엄두도 나지 않는다. 경사가 너무 급해 60도를 넘는 것 같은데다, 길은 꼬불꼬불하면서도 부스러지는 바위가 섞여 있어 온 신경이 등산로로만 쏠린다.
때 이른 더위마저 여름날씨를 방불케 한다. 기온이 30도 가까이 올라가는 정도니 온 몸은 금새 땀으로 젖어 버린다. 이쯤되면 여름을 방불케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식으로 여름의 명함을 들고 찾아 온 계절인 것이리라. 여름을 재촉하는 것은 땀뿐이 아니다. 주차장에서부터 나를 따라다니는 파리가 극성이다. 다른 야산에서는 훌쭉 마른 날씬한 파리가 많이 있더니만 여기서는 그렇지도 않다. 그렇다고 뚱뚱하지도 않은데 크지도 않다. 아주 초파리도 아닌 것이 계속하여 우리를 따라 다닌다. 이것도 필시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로 인하여 살아가는 그런 동물이지 싶다. 손으로 휘휘 저으면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한참씩 있다가 날아오는 것이 보통의 파리이건만 이놈들은 그렇지도 않다. 팔을 내저으면 그뿐,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 숨바꼭질을 하자고 조르는 모양과 흡사하다.
한참을 실랑이하다보니 경사도 잠깐뿐, 이내 등성이가 나오면서 평지로 이어진다. 숨가쁘게 올라온 능선은 제1봉 북쪽에서부터 동으로 돌아 3봉 남쪽에 이르기까지 제법 긴 등성이를 이룬다. 산이야 높지 않지만 백두대간과 견주고 싶은데 규모가 작으니 어쩌랴. 대아중간이라 부르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할 것 같다.
대아중간은 숲이 우거진 산들로 이어져 있다. 소나무도 있으며 굴참나무며 상수리나무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내 키보다도 훨씬 큰 진달래도 있다. 언제부터 거기 그렇게 서 있었는지 물어보지만 진달래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다음에도 다음에도 만나는 족족 물어보아도 아무 말이 없다. 아마도 저 아래 안내도만큼이나 오래 전부터 서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그 할아버지대부터 죽 서있었는지도 모른다.
제3봉이 가까워지는 바로 턱밑에서 금낭화 자생군락지가 있다는 팻말이 보인다. 아까 입구에서 보았던 바로 그 금낭화 자생군락지이다. 보통 복주머니도 아닌 금주머니라는데 안 가볼 수가 없다. 그것도 인조가 아닌 자연산 금이 아니던가. 작은 모퉁이를 돌아서니 바로 거기에 자생지가 있다. 눈앞에 펼쳐지는 약 1,000 여 평의 군락지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한창 여문 꽃망울을 머금는가 하면 이제 막 피어나는 꽃도 있어 아주 탐스러운 자태를 뿜어내고 있었다. 명색이 프로라는 사진작가들도 귀하디 귀한 금낭화 앞에서는 어쩔 줄을 모른다. 하긴 내 생각으로도 저렇게 지천으로 깔린 금주머니를 작은 카메라 속에 모두 넣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도 답은 한 가지. 가장 크고 가장 탐스러우면서 가장 예쁜 꽃을 먼저 찍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필름이 모자라면 그뿐, 내년을 약속하며 돌아가면 될 것 아니던가.
아니나 다를까. 사진작가들도 어떻게 알아 차렸는지 홀현이 나타난 아름다운 꽃을 골라 사진기에 담느라고 정신이 없다. 들어오지 말라고 쳐 놓은 금줄도 넘고, 위험하다고 쳐 놓은 안전줄도 넘는다. 넓디 넓은 골짜기에 피어있는 꽃 중에서 가장 커다란 꽃을 한참 살피더니 찰카닥하고 꺾어버린다. 그러더니 카메라 속에 스르르 접어 넣는 것이 또한 예술이다. 사진작가는 지금 가장 사랑스러운 꽃, 생화를 보고 있는 것이다. 쳇, 그럴러면 집에서 보아도 되는데 왜 여기까지 와서 본단 말인가. 나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길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던데 나는 어떤 존재인가. 그래도 나는 금낭화와 밀어를 나누고 돌아왔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그들은 대체로 12개에서 15개의 금주머니를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가득 가득 금으로 채워 넣을 것이란다. 그러다가 착한 일을 하거나 남을 돕는 등 아름다운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주머니를 열어 금을 나누어 줄 것이라는 말도 들었다.
나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다. 금낭화도 사람을 기쁘게하는데 사람이 사람을 기쁘게 하지 못할 일이 뭐가 있을까. 저렇게 많은 주머니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의 선물이 들어있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마음도 밝아진다. 대자연이 대아중간에서 금낭화를 피우고 주머니마다 금으로 가득 채워놓았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만 남은 셈이다. 내가 그 복주머니의 선물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노력하는 것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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