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는 아직도 푸르다
1번 국도를 따라 여산을 지날 때면 생각나는 곳이 있다. 그런데 이곳은 먼 곳도 아니니 다시 찾아가 봐야지 하면서도 그냥 지나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가까이에 있는 우리고장의 대표문인 생가가 바로 그 곳이다.
현대 시조의 기둥인 가람 이 병기선생에 대하여 우리가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는데, 다시 확인해보면 1891년에 태어나 1968에 돌아가실 때 까지 우리글과 우리말을 보존하고 아름답게 꽃 피우는데 노력하신 분이다.
선생 이전인 조선 시대의 시조는 시적인 재능이 있어야 하면서도 한학을 알지 못하면 시를 읊지 못했다. 그러나 시적 감각이 있으면 굳이 정형화된 틀을 빌리지 않고도 누구나 쉽게 시를 쓸 수 있도록, 선생께서 우리글과 우리말로 길을 터 주신 것이다. 그러니 가람은 당시 갇힌 울타리 속에 있던 시조를 마을 어귀까지 끌어내어, 누구나 오며 가며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람 이병기선생의 생가 팻말에 가까와지면 나는 곁에 있는 일행에게 꼭 한마디 던지곤 했었다. 여기서 꼬불꼬불이면 바로 저 곳이 생가라고. 그리고는 또 눈치를 보아 싫어하는 것 같지 않으면 나의 일방적인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그 집에 가면 들어서자마자 연못이 있고, 그 옆에 백일홍이 있는데 그 크기로 보아 족히 100년은 넘었고, 안채는 사랑채보다 높은데 마당도 2층이라고 설명했었다. 그런 후 눈치를 보아 10분만 투자하면 가서 보고 오는 데 충분하니 한번 가 보자고도 했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내가 이렇게 시키지도 않은 일에 열심이었던 것은, 아마도 나는 선생을 흠모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글세대인 나는 당연히 선생께 고마움을 표해야 할 것이다. 그 분이 겪은 한글사랑으로 인한 고통은 우리가 지금 더듬어 보아도 숭고할 뿐이다.
처음 찾아 본 선생의 생가는 아담한 모습으로, 시골 정취가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였었다. 많이 가꾸지 않아도 그냥 있는 그대로 정감이 가는 고향집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찾았을 때는 1973년에 지방기념물 제6호로 지정된 이 생가가 문학적 명소로 거듭나고 있는 듯 했다. 주변을 청소하기도하고, 선생을 기리는 기념비도 세우고, 일정구역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도 풍겼다.
그래도 이 정도라면 한국문학의 거목에 대한 배려가 어딘지 모르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선생께서 우리 문단에 끼친 영향이 크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1920년대까지도 우리가 움집을 짓고 살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는 일기라든지, 한중록, 인현왕후전, 대한계년사, 금강경삼가해, 계축일기, 어우여담, 요로원야화기, 가루지기타령 등을 발굴하는 등, 그 의 국문학사랑은 누가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고 있다.
지방자치제가 되면서 늦었지만 그래도 이러한 자랑스러운 사실에 대하여 좀 더 세세한 부분까지 찾아내 이 고장 최고의 문학인에 대한 예를 갖추기 시작했다. 동상을 제작하여 세웠고 방문객을 위한 주차장도 만들었다. 소형 승용차 한대만 들어 와도 비켜 갈 수 없는 외길은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차를 돌려 주차 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만 해도 고맙기 그지없다. 이 정도 되면 복잡한 피서지대신 언제든지 도시락들고 찾아와 부담없이 쉬다가 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전에는 대충 둘러보고 왔었지만 오늘은 관심있게 살펴보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구석구석을 들쳐보고, 전에 느꼈던 있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고,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던 상황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며 곳곳을 돌아다녀 보았다.
가람 생가는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진사동 573번지는 언덕배기에 500여 평도 넘는 넓은 터를 가진 집이다. 동향으로 앉은 이 집에 살면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고 바로 잠에서 깨어 날 것만 같다. 세상의 모든 범사는 안채에 근접하지 못하도록 사랑채가 가로 막아 보호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일반적인 칭호로 보면 4칸 이지만 칸막이에 의한 사랑채의 규모가 모두 6칸으로 되어있다. 이는 안채가 건넌방과 2칸 장방, 그리고 마루와 부엌을 합쳐 4칸인 것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크기이다. 고방채(庫房棟)가 별도로 있고 승운정(勝蕓亭)이라 붙여 진 모정도 가지고 있어 전체적인 짜임새를 볼 때 전통적인 선비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이 모정은 대의를 걱정하다가 근심에 싸이면, 자연을 감상하면서 고뇌를 식히던 장소가 되었음직하다. 반면에 큰 길에서 700m나 떨어진 이 곳 까지 바쁜 걸음을 재촉한 길손에게 땀을 식히며, 자신이 방금 지나온 길을 바라보면서 삶을 생각하는 그런 곳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후 주인을 찾을 수 있도록 망중한의 여유를 주던 곳에 틀림없으니 객에 대한 배려도 의미롭다. 손님을 맞는 주인역시 무례를 면할 수 있는 준비를 하며 객을 대접하였으리라 생각하니 담도 대문도 없는 이 집이, 아무나 찾아 올수는 있으나 누구도 쉽게 범하지 못하는 그런 곳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채에는 수우재(守愚齋)라고 쓰여 진 현판이 걸려 있고, 그 중 한 간에는 진수당(鎭壽堂)이라는 방이 있다. 다시 생각해보면 선생이 태어나신 곳도 이곳이고, 마지막 숨을 거두신 곳도 이 곳이다. 그 사이 38년간은 이 집을 떠나 타향에서 생활한 것으로 보여 지는데, 말년에 다시 이 곳 수우재로 돌아 온 것은 아마도 명칭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을 이곳에 모아 조용히 간직하고 있는 집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다른 곳, 다른 국민들에게는 모든 근심 걱정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바로 수우재라는 현판을 걸었다는 생각에 닿자 다시 한번 선생에 대하여 고맙게 생각된다.
공부방이었다고 생각되는 진수당 역시 한자의 뜻풀이로 본다면 생명을 안정시키는 방이니, 변환기 격동의 삶을 뒤로 하고 기나긴 10년간의 투병생활이 그 방에서 있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기마저 하다.
가람(伽藍)은 불가의 건축물을 일컫는 말인데 선생의 호인 가람(嘉藍)이 어디서 연유되었는지 모르지만 역시 선생다운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수우재와 승운정에서 보이는 바로 앞에 작은 연못을 파서 물을 가두고, 그 곁에 선유목 배롱나무를 심었으니, 그 곳을 바라보면 시상(詩想)이 절로 생겨나지 않았을까. 보통 선비의 집안에는 잘 심지 않았던 나무인데, 그 크기를 보니 밑둥 직경이 40cm나 되어 예전부터 심어져 온 것이 확실하고 보면, 어릴 적부터 시선(詩仙)들과 시(詩)동무하며 지냈던 것도 확실하다. 연못의 반대쪽에는 동백이 있는데, 이것 역시 밑둥 굵기가 한자도 넘으며, 그 긴 세월동안 수우재의 주인을 기다리는 망주목(望主木)이 되어 배롱나무와 마주보고 서 있다.
이렇게 가신님을 그리워하는 것은 일상의 손때 묻은 것만이 아니고 후세의 생면부지 지자체 사람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발 빠른 지자체에서는 이 생가를 관광명소화하고, 그를 기념하자고 대대적인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다. 동상의 위엄을 갖추기 위하여 입석대도 세웠다. 그러고 보니 살아계신 선생을 본 듯 하여 정겹다.
반면 그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주변의 흙들은 파 헤쳐지고, 보도 블럭이 입석대를 둘러싸고 있어 거기에 새겨진 글씨를 도저히 읽어 볼 수가 없다. 입구에 서있던 커다란 기념비는 주차장 건너편 언덕위로 이동하여 새로운 좌대를 얻어 둥지를 틀었다. 주차장에는 공사용 자재가 널려 있고, 멍석위에서는 나락들이 옷을 말리느라고 햇볕을 한없이 부르고 있다. 그러나 해님은 간청에 못이긴 척 나타나, 여름내 지겹도록 비를 맞아 누렇게 염색된 옷과 빨간 고추 잠자리사이로 숨바꼭질하고 있다. 좁은 국토에서 남는 땅 놀리면 뭐하나 싶어, 그것도 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보기에는 싫지 않다. 어차피 세상살이가 다 그런 변화 속에서 발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전에는 골목길 입구에만 외로이 서 있던 간판이 이제는 몇 키로 미터 앞에서부터 예고하고 있으니 많은 발전을 한 것이다. 없던 마당도 만들고, 포장까지 해주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은가. 거기다가 폼나는 청동 입상까지 세우니 이제 틀이 잡힌 유적지가 되었다. 그러나 본래에 없던 것들을 갖추고 준비한다는 핑계를 대다보니 주변이 항상 어지렵혀 있고, 그칠 줄 모르는 년차 공사는 언제 끝날지 짐작이 안 간다. 지금 추진 중인 공사도 빨리 마무리하여 이곳을 찾는 이들이 차분한 마음으로 가람을 회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빨리빨리 문화와는 다른 것이다.
1년 중 공사 중인 날이 더 많고, 그나마 일하는 날보다 쉬는 날이 더 많으면 선생을 만나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선생은 승운정에서 예를 다듬은 그런 객들만 맞이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혹시나 공사기간 동안 또 다른 먼 여행길을 떠나지는 않으셨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생을 다시 모시기는 한 동안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겉에 보이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 사이에 안채와 사랑채는 그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 방 안쪽 덧문 미닫이는 떨어져나가 방바닥에 뒹구니 소음이 그대로 들어와 글을 읽을 수가 없을 것 같고, 천장에는 흑백지도를 붙여 놓았으니 자나 깨나 눈에 보이는 것은 외지의 유혹이었으리라. 거기다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당시 쓰다 남은 먹물을 연못에 버렸으니 그 연못물이 시커멓게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하겠다. 이것은 모두 우리 생활의 대변(對辯)인 듯하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집 전체를 감싸고 있는 뒷 켠의 대밭뿐이다. 그리고 하나 더 그 속에는 가람의 마음이 있다.
이제는 선생을 찾으러 어디에 머리를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가까이 있을 때 잘 모시지 못하고 자랑만 하던 것이 후회스럽다. 정말 멀리 가셨다면 나는 선생을 찾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여야 할지 벌써 걱정이 앞선다. 혹시 그분도 나를 사랑하셨다면 가까이 어디에서 쉬고 계실 것 같아 막연한 기대를 해 본다.
그렇다면 빨리 승운정을 다듬고, 선유목에 가위질도 하여 주인 맞을 준비를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는 거기 앉아 먹을 갈아야겠다. 붓이 칼보다 강하듯이,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중하게 생각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