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산문, 수필, 칼럼

우리하기 나름

꿈꾸는 세상살이 2006. 6. 4. 18:27
 

우리하기 나름 / 한 호철


  1983년 멕시코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는 한국의 무대였었다. 1977년 첫 도전에서 지역 예선탈락, 1979년에 9위, 1981년에 11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1983년에는 강호 멕시코와 우루과이를 꺾고, 한국축구대회 사상 처음으로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때 작전은 전원 파상 공격의 일명 벌떼 작전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 본선 진출도 못하더니 1997년에는 본선에는 진출했으나 브라질 전에서 10:3으로 패하고 말았다.

 어쨌든 한국이 세계 4강에 든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박 종환 감독이었다. 전원이 공격하고 필요하면 전원이 수비하며 필요하면 상대방 한 사람을 놓고 여럿이서 에워싸는 방어 작전 등이었다. 그때의 작전을 지금 이 시대의 단어로 표현하면 히딩크 작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박 종환 감독과  히딩크 감독의 전술은 굳이 표현하면 다르겠지만 내용은 비슷은 했다고 본다. 우선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수비와 공격을 수시로 바꿔가며 상대방을 집중 마크하는 등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아주 흡사하다. 

그러면 다른 점은 무엇일까,  우선 청소년 팀과 성인 팀과의 차이, 내국인과 외국인의 차이, 경기장소가 타국인 점과 경기 개최국인 점등이 다르겠다.  박 감독 시절은 컴퓨터가 그리 발달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순전히 머리 속에 넣어두고, 종이에 적어서 지도하다 보니 데이터 량에 한계가 있고,  그의 활용에 약간의 혼선을 빚었으리라.  그리고 강인한 체력을 갖추도록 요구했을 때, 지도자의 자질이 부족하여 기술도 없으면서, 무조건 어린 선수들을 혹사시킨다고 말들이 많았었다.  그러나 박 감독도 그것을 이기고 해냈다.  그러나 그 후 곧 감독에서 물러선 것으로 기억난다.

 그리고 히딩크도 월드컵 4강 달성 후 곧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박감독은 돈방석에 앉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는데, 히딩크는 돈방석에 돈 침대에서 산다고 한다.  지금과 과거의 차이점이다.  과거 박 감독 시절의 세계청소년 축구 4강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감독이 팀을 이끄는 수단도 열악한 시절이었고, 스태프들과 재정적인 면, 교통적인 면, 정보적인 면 어느 것 하나 지금보다 나은 조건이 없다.  거기다가 박 감독과 경쟁상대에 있던 동료 감독들과, 바로 이어서 치고 올라오는 감독들도 많았었다. 

 그러나 히딩크 시절에는 한국의 선수들이 그 정도의 기술과 정신상태, 여러 조건 등을 볼 때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 있었고, 한국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지원하여 주었으며, 훈련환경과 정보보유 및 활용, 체계적인 피로회복 대책 등을 뒷받침해 주었다. 또 그것도 모자라서 감독 영입시 임기 및 임기 내 직권보장, 팀 운영의 전권 부여 등 가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감독은 달랐지만 같은 골격의 내용으로 훈련하고 같은 정도의 성과를 냈는데도 그 뒤의 명암은 크게 달랐다.

 이는 한국인의 성격에서 자인된 것이라는 생각도 있다. 우리의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는 말이 있다.  박 감독은 우리의 사촌이었던 것이고, 히딩크는 순전히 남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히딩크가 잘 되는 건 나에게 별로 해가 되는 것이 아니니 배가 아프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를 끌어내릴 필요도 없었다. 

 히딩크는 분명 축구계의 영웅이다. 그가 이끈 축구팀은 3회 연속 네델란드리그 우승과, 한 해에 국제대회 우승 2회, 최근에는 1998년 월드컵에서 네델란드가 4강에 들기도 했다. 이것만으로도 방법에 관계없이 축구계에서는 알아주는 명장임에 틀림없다.

 2002 한일 월드컵이 끝나고 우리의 자축연자리에서 월드컵엔트리에는 들었지만 경기장에서는 한 번도 뛰지 못한 선수가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4강 진입축하 포상금을 지급할 방법으로, 정부에서는 경기를 한 선수와 경기를 하지 않은 선수를 차별하여 포상한다고 할 때, 모든 선수들이 극구 반대를 하였었다. 이는 히딩크의 용병술에서 기인한 것인데, 이 방법은 경기 전 날까지도 경기 참가자를 지정하지 않고, 상호간에 잔뜩 경쟁심리를 부추긴 후, 정작 출전시간이 되면 정해진 선수들만이 뛰었다. 그들 중에 부상이나 피로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을 때에만 교체 출전토록 했던 것이다.

 이 방법이 축구경기 자체에서는 선수들이 최선의 컨디션을 유지했는지 몰라도, 심한 자괴감과 어떤 때는 모멸감과 배신감 마저 초래하는 전술이었던 것이다. 특히 현대의 스포츠는 참가하는데 의의가 있다고 하면서도, 최종적으로는 승리하기 위하여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라면, 어떤 수단이든지 우리의 월드컵 4강은 반드시 필요했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분명한 것은 선수들 자신마저도, 아시아에 국한된 그것도 종이 호랑이 신세인 것을 파악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체력과 정신력 그리고 기술 모두가 부족한 상태에서,  이제는 마지막 단계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기를 버리고 히딩크의 지시를 따랐던 것이다.

 어느 감독이 후배 선수들에게 시켜서 선배 선수들과 반말을 하게 하고, 기술이 없으면 인간 기본 대접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가르친단 말인가. 이러한 방법은 운동경기에서나 가능하고, 그것도 한국축구의 절박한 심정에 있을 때 그리고 단 한 번에 그쳐야 한다.     만약 이런 방법이 계속해서 통용된다면 한국의 미풍양속이 파괴되며, 직장처럼 평생을 몸바쳐 일해야 되는 곳에서는 곧 바로 배신감에 이은 이직 현상이 벌어질 것이다.

 우선 팀 내에서 경쟁을 하여 살아 남아야, 팀간의 경쟁에서 이긴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있으나, 그것만으로 목표 달성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혹시나 그런 성공은 삐뚤어진 성공이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그렇지만 히딩크방식의 단면만을 보지말고 전체적으로도 장점이 있음을 높이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핵심과제를 간결하게 제시하고, 구성원이 명확한 목표를 갖도록 하므로서 집중하도록 한 것은 주효했다. 연고 주의를 넘어서 가능한 인재를 과학적으로 분석 평가하여 기용하고, 상호간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노력을 하도록 유도한 것 등은 칭찬할 만하다. 무조건 뛰어다니지 말고 골 결정력 향상에 노력하고, 전체적인 팀의 골 장악력, 그리고 효율적인 축구를 하도록 생각하면서 뛰도록 요구했다.

 모든 것들이 교과서에 나오는 것들이지만 실제로 행동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기본과제 위에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계획대로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외국인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만약 한국인 감독이었다면 이 모양 저 모양을 눈치보고, 여기 저기서 훈수 듣다가 벌써 경기가 시작되었을 법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 변해야 한다.  아쉽더라도 조금씩 버려야 하고 입맛에 맞지 않더라도 영양이 풍부한 것은 먹을 줄도 알아야 한다.  내 것만을 고집한다면 발전이 없을 건 뻔하다. 전에 쇄국 정치를 하던 시절, 우리 군대가 프랑스 등 선진국의 상선 몇 척을 무찔렀다고 우쭐대던 자세는 버려야 한다. 상선과 군선은 싸움 상대가 아니다.

가만히 두어도 물 흐르듯 변하는 것이 역사인데도 과거를 붙잡고 그것을 고집한다면, 특히 다양화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다. 그렇게 하면 우리만이 처지고 우리만이 후진국으로 남게될 것이다. 이렇게 같은 조건, 환경, 자원을 가지고도 다른 결과를 낼 수 있는 것은 훌륭한 기술이다. 그러나 그러한 결과를  내도록 할 수 있고 없고는, 우리가 그 감독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했느냐 안 했느냐 하는데 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우리하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2002. 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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