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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환원의 한 방법

꿈꾸는 세상살이 2006. 6. 4. 18:31
 

사회 환원의 한 방법 / 한 호철


  매년 기사화 되는 사항이기는 하지만, 미성년자가 다량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들으면 일반인들은 맥이 풀리곤 한다.  만 두 살짜리 아기가 2만 9천 250주로 13억 원대의 주주라거나, 19살의 미성년자가 70억 원, 17살의 미성년자가 17억 원 등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 중 최고 금액은 83억 원 어치의 주식 소유자인데, 이러한 수치는 파악된 미성년자 44명이 평균 10억 원 어치 이상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래도 요즈음은 합법적으로 증여하며, 관계되는 세금도 모두 납부하므로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고, 그들도 떳떳하게 실행하는 것이다. 그렇다해도 보통 사람들은 상상하기 힘든 금액이거나 거의 꿈속에서나 가져 봄직한 주식 수이다.  이들은 다만 여타의 미성년자들과 비교하여 서로 다른 그룹이 형성된다는 사실에 관심을 둠직하다. 또 13살의 어느 미성년자는 경기도 평택의 임야 3,400평을 두 차례에 걸쳐, 8살의 미성년자가 경기도 가평의 임야 1,580평을 세 차례에 걸쳐 구입한 것은 본인의 소득에 의하여 구입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어떻게 구입한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런 소식을 접하면 보이지 않는 벽도 생기고, 괜히 짜증나는 늦여름 오후가 된 기분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고 자기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들도 많다. 

 어떤 사람들은 반 백년을 같이 살아온 아내에게, 자기 재산을 이혼 위자료로 주기보다는, 차라리 모르는 사람에게 주겠다고 학교나 자선단체에 기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어느 누가 옳고 누구는 틀렸다고 말 할 수도 없다.  다만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합법적이고, 그래도 잘못된 것은 아니구나 하는 소리를 듣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 생활 속에서 헌혈을 한다든지,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낸다든지 하면서 남을 도우며 살아가기는 하지만, 금액의 절대치가 큰 경우는 쉽지 않은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도 애써 모은 재산으로 남을 돕도록 하라는 사람이 의외로 많이 있다.

  조선시대의 거상 임 상옥이도 그랬고,  강철 왕 카네기도 그랬고,  조지 소로스회장이나 최근의 빌게이츠도 자기 재산의 많은 부분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했다.

 그중 유명한 사람중의 하나가 노벨이다.  다이너마이트의 원료인 니트로 글리세린은 이탈리아의 아스카니오 소브레로가 발명하였지만, 이를 취급하기 좋게 개선하여 상품화한 사람은 스웨덴의 화학자 노벨이다. 이 노벨은 자신의 실수로 원료를 땅에 쏟은 것으로부터 착안하여 상품화시킬 수 있었다. 다이너마이트를 팔아 거부가 된 어느 날 노벨의 형이 죽었는데, 신문에 잘못 보도되어 노벨이 죽은 것으로 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은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많은 재산을 기증한 경우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도 많은 사람들이 어렵게 모은 자신의 전 재산을 기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그들은 들어 내 놓지 않기 때문에 찾아보아야 할 뿐이다. 미원 그룹의 창업자 임 대홍씨는 1983년에 정읍 실내체육관에 당시 9억 원을 희사하여 지었고, 1989년과 1990년에 시립도서관, 정읍사 국악원 등을 10억 원 들여 지은 적이 있다.  그리고 매번 억대의 현금을 지원하기도 한다.  또 부영건설은 1983년 창업이래 약 33회에 걸쳐, 학교 기숙사나 노인 복지시설 등을 건축하여 기증했다. 1926년에 창업한 민족기업 유한양행도 기업경영 투명성 1위를 차지하면서, 회장 유 일한씨는 성실 납세로 1968년에 산업훈장을 받은 적이 있다. 1970년에는 주식 8만 300주를 기증한바 있으며, 딸에게 남긴 재산도 유한동산을 만들어 어린이가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도록 한다는 조건에서 물려주었다고 한다.  1971년에 죽은 뒤에도 당시 2억 2,500만 원 상당인 14만 천 여 주를 모두 재단에 기증한 바 있다.

  국내 한의학 박사 여성 1호인 삼신할미 강 명자원장은 1972년 한의대를 수석 졸업한 후, 한의원을 운영하여 번 돈을 1996년에 꽃마을 한방병원재단으로 전환시켰다.  2001년 5월 21일에는 이북 출신 이 연희여사의 삯바느질 값,  빨래 삯으로 모은 25억 원대 토지를 이 여사의 유가족이 연세대에 기증했다.  이는 고인의 유언에 따른 것인데, 그의 아들이 사업관계로 근저당 설정한 것을 1년 간 노력하여 근저당을 해제하고, 드디어 기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대를 이은 봉사라고 생각된다. 가족 없이 혼자 살며 모은 55억 원을 환원한 68세의 강 처녀할머니,  30년 간 몸뻬 바지를 입은 김밥 할머니의 50억 원,  못 배운 것의 한을 풀고 싶었던 이 종대 할아버지의 50억 원,  90세 오 현우 할아버지의 36억 원 등 많은 분들이 자신의 목숨만큼이나 아끼던 재산을 선뜻 기증한 경우다.  스톡옵션이라는 조건이 결부된 것이지만 국민 은행장의 66억 원 환원이나, 수원 교차로의 황 필상씨가 매출액 대비 순이익이 16%나 되는 우량기업의 주식 90%와 현금 15억 원을 아주대에 기증하였다.  또 작년에 한 실향민 강 태원씨는 꽃동네에 100억 원을 보냈고, 올해에는 현금 200억 원과 부동산 70억 원 상당의 땅을 KBS에 기탁했다.  이 액수는 기증 사상 최대의 금액이라고 한다.  전에 어느 그룹이 세무 사찰이나 그룹 흡수합병시 함수관계에서 많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적은 있었지만, 개인의 노력에 의해 번 돈으로써는 액수나 방법 등에서 많은 귀감이 되고 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우리 사회의 약수가 되고 청량제가 되고 있다.  이 돈으로도 우리나라의 필요한 모든 부분을 다 해결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러한 마음씨를 가진 국민이 아직도 많이 있다는데 감사한다.  다른 사람들은 비록 현재 가진 재산이 적어서, 쪼개어 내어놓아도 표시가 잘 안 나고 있지만, 그래도 그런 정성이 모이고 모이면 강을 이룬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거기다가 우리나라의 외환 위기시 88만 건에 5ton이나 모은 금모으기 운동과, 이번에 보여준 온 국민의 정성어린 수재 의연금 모금은 그 얼마나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던가. 이러한 것들이 한국인의 저력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태풍 ‘루사’가 훑고 지나간 후의 추석은 더욱 우리를 슬프게 하지만 모두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2002. 0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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