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 문화 / 한 호철
세상을 살면서 자신의 꿈을 모두 이루고 살기는 힘든 일 이다.
자신의 노력이 부족했든지 다른 더 좋은 꿈으로의 전환 때문이든지, 환경의 변화 때문이든지 등의 사유로 꿈을 접을 수밖에 없는 경우가 간혹 있다. 그러면 그 꿈에 대한 동경심을 간직하게 되고 가까운 사람이 그 꿈을 이루게 되면, 나는 그를 통하여 대리만족 하게 되는 수도 있다. 이 대리 만족을 시켜준 그 사람이 자신의 자녀 인 경우는 그 기쁨이 한층 크다.
어떤 때는 처음부터 대리만족을 목적으로 자녀를 가르치게도 된다. 나는 못 배웠고 그로 인해 온갖 설움을 당했으니 그에 대한 앙갚음이나 복수심으로, 자식은 반드시 많이 가르치고 싶은 것이 한국인 부모의 마음이었다.
그렇다면 그 당시의 많은 부모들은 누구한테 그런 괄시를 받았던 것일까? 먼 옛날 고려, 조선시대에도 그랬었겠지만, 근래의 구 한 말부터 일제 강점기에는 그 도가 더 심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대리 만족의 꿈을 이루고 싶어했던 부모들이 살았던, 바로 그 시기에 느낀 감정의 대변이라고 보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시대에는 과연 무슨 억울한 일들이 그렇게 많이 일어났던 것일까? 상놈이 돈벌어서 매관매직하여 양반의 행세하던 것은 차라리 애교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당시의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기득권 층의 배우고 배부른 사람들의 종노릇을 하기에 거칠 것이 없었다. 돈을 빌려주고도 언제까지 갚을 것이며, 어떤 것을 담보로 한다는 내용의 채권자와 채무자가 뒤바뀐 문서에, 도장을 보기 좋게 또렷이 찍어주는 것은 흔히 발생한 일이었다. 자식이나 다름없이 애지중지하던 소를 어느 날 갑자기 빼앗기고, 집이 날아가고도 모자라 빚을 새경으로 갚는 그 집의 머슴이 되곤 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무학을 한탄하고, 글을 모르는 자신을 원망하면서 한국인 특유의 배움에 대한 한(恨)의 문화가 생성되었다고 여겨진다. 열심히 일해도 먹고살기 힘든 시절에, 못 배운 내가 잘 배운 남의 입까지 해결해 주고 나서 터득한 것은, 내 자녀만큼은 조기교육, 특수교육 등으로 남보다 앞서가는 것을 모두 제공해 주고 보자는 것이었다.
이것이 한국인의 자기본위 심리를 자극했지만, 경제 현대화에 한 몫 했다고 생각된다. 또 논 농사위주의 농경사회인 일제 강점기에는 수탈 당하고, 한국전쟁으로 폐허된 상태에서는 제대로 먹고살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에도 자신이 겪은, 못 먹은 서러움을 자식에게만은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물로 배를 채우더라도 자식은 죽으로 배를 채워주던, 먹는 것에 대한 한의 문화도 생겼다고 추정된다.
나는 너희들 없을 때 많이 먹었다 라든지, 오늘 일하러 간 집에서 많이 먹고 남아서 싸온 것이니 너희들이나 많이 먹으라는 얘기는, 어느 대목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우리시대 부모들의 자상하신 설명문구다. 이 부모들은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배고파 할 자식들을 생각하다가 남의 담을 넘고, 남의 집 독에 손을 댔던 것이다. 놀고 먹는 구걸 가족자녀를 두는 것보다는, 나는 죄를 짓더라도 자식은 서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한 극약 처방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돈 벌러 외국에 간 아빠는 왜 아직 소식이 없는지 모르겠다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는 문구도 자주 등장했었다. 그리고 조금 더 있다가는 돈은 그만두고, 제발 몸이라도 성히 돌아온다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얼버무린 세대들의 문화이기도 했다. 그리고나서 얼마 후 정말로 몸만 달랑 돌아오기도 했다.
이제 우리세대는 그 한의 세대들이 만들어 준 길을 지나 평탄한 신작로에 접어섰다. 그때 억새풀을 헤치며 위험한 짐승들을 쫓아내고, 길을 내주었던 등대지기와 같은 분들을 부모세대로 둔 것이다.
나침반과 전자지도에 밀려 수명을 다한 등대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며 지나가면 잊어버리는 존재로 만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 분들의 한의 문화를 흥의 문화로 바꾸어 주어야 한다. 자신이 무슨 덕을 보기 위해서 한 행위는 아니었지만, 자식이 잘 되면 그것이 곧 자신의 성공이었다는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분들이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살아온 삶은 힘들고 고달팠지만, 그래도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했다는 성취감, 그리고 그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고 나서야 행복한 마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2002. 0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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