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산문, 수필, 칼럼

그때 우리가 본 것은...

꿈꾸는 세상살이 2006. 6. 15. 09:16
그때 우리가 본 것은...  /  한 호철


초등학교 6학년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수업이 끝났어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모두 기다리고 있었다. 정규 수업도 끝났으니 공부는 아닌 것이 분명하였고, 운동회 연습도 아닌데 무슨 일인지 매우 궁금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유도 모른 채 그냥 잠시 기다려 보라는 전달이 전부였었다. 

 

담임선생님은 주의사항을 설명하시고, 교실 뒤 실습장으로 가서는 풀도 뽑고 거름도 주는 그냥 그런 일들만 시키셨다. 오늘은 왜 풀을 뽑아야 하는지, 채소와  과일이 어떻게 다른지도 모른 채 그냥 일만 하였다.

씨앗을 우리가 뿌렸는데 가꾸는 것도 우리가 하는게 맞는지 물어 볼 사람도 없었지만, 누굴 붙잡고 물어보았어도 아마 당시의 답은 맞다였을 것이다.

정답을 벌써 알고나 있었던지 우리들도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 풀뽑기가 끝나면 축사에 있는 동물에게 풀을 갖다 주기도 하고 일부는 한 곳으로 모아 놓기도 하였다. 적당히 말린 풀로 만든 퇴비는 이른바 내년 농사 준비를 하는 든든한 저축인 것이다.

만약 요즘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시키는 일이 이렇다면 아마도 학교가 시끄럽고 마을 전체가 시끄러웠을 만한 일이다. 그런데 그 날의 우리 담임선생님은 아마도 그런 걱정이 안 들었던 모양이시다.

 

그러는 사이 해가 저물고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우리들은 이제야 끝이 났구나하면서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면 더 이상 아무 일을 할 수 없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할일이 많이 남아 있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전혀 위엄 있게 들리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이제 곧 끝이라는 생각이 피곤한 마음을 위로해주고 있었다. 선생님도 이제는 단념을 하신 듯 우리들을 집합시키셨는데 그러고도 일장 훈시는 더 이어졌다.

평상시 공부가 어떻고, 수업분위기가 어떻다느니, 이렇게 해서 중학교 시험에 좋은 성적이 나오겠느냐는 둥 여러 가지로 기를 꺾는 말씀만 하신 것으로 기억된다. 세상에 담임선생님이 자기 반 아이들에게 공부라는 문제로 뭐라 하시는데, 학생들은 무슨 변명이 있었을까.

우리들은 하나같이 그냥 꿀 먹은 벙어리요, 이불에 오줌 싼 죄인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들은 노동으로 봉사한 대가도 없이, 저녁도 굶어가면서 이게 무슨 잘한 일이냐는 슬픔에 싸여있었다. 그러나 더 큰 비애는 학생들이 공부를 못한다는데 무슨 할 말이 있었으랴.

무심한 하늘에는 그믐달이 뜨려는지 하현달이 뜨려는지 아직 구름만 자리하고 있었다. 마침 월식이 있는 날인데 예정된 시간이 벌써 지나버렸지만 월식은커녕 아직 달도 뜨지 않았다는 말씀도 하셨다.

 

한참 후 우리는 모든 것을 짐작하였다. 대자연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싶으셨던 선생님의 마음을 읽어 낸 것이다. 농촌의 현실을 잘 알고 있던 터에 한 사람도 집에 가지 말라고 하셨고, 기다리는 동안 지루하지 않도록 일거리를 만들어 주신 것이다.

그런데 날이 저물어도 달이 뜨지 않으니 그 마음이 오죽하였으랴. 기다린 끝에 달이 떠야 되는데, 마치 자신의 잘못으로 뜨지 않는 것 같은 마음을 가지니 얼마나 민망하였겠는가.

하지만 선생님, 다시 그런 일이 있으면 미리 말씀해 주세요. 야식이라도 준비하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때 정말 배가 고팠거든요.

 

결국 우리는 그날 월식을 보지 못하였다. 마냥 기다리던 우리들은 터벅터벅 밤길을 걸어 가야하는 두려움도 잊은 채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자연보다 진한 인공을 보았으니 거기에는 다른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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