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역
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역
입뿐이 곱뿐이 모두 나와 반겨 주겠지
달려라 고향 열차 설레는 가슴 안고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
코스모스 반겨 주는 정든 고향역
다정히 손잡고 고갯마루 넘어서 갈 때
흰머리 날리면서 달려온 어머님을
얼싸안고 바라보았네 멀어진 나의 고향역
1970년대 자주 불렀던 노래중 하나다. 곡이 어렵지도 않고 가사 내용도 그냥 우리네 시골 풍경과 비슷하여 쉽게 따라 불렀던 기억이 있다. 거기에는 내가 기차로 통학하던 시절이 있었기에, 기차에 대한 매력이 더 강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내가 기차로 통학하던 곳은 황등역에서 익산역 당시의 이리역 사이 구간이었다. 역 간으로는 단 한 구간에 지나지 않아 기차를 타면서 바로 내려야하는 서운함도 있었지만, 대신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 않았다는 고마운 점도 있었던 곳이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기차를 타고 통학을 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정말 황송할 정도로 고마운 일이었다. 황등역은 전라북도 익산시 황등면 황등리 999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내가 살던 고향집과는 약 600m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내가 살았던 집은 황등산 자락으로 산의 정기가 내려오다 멈춘 마지막 지점에 해당하는 곳이었으며, 황등역이 내려다보이는 정도의 높이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옆에는 충혼탑도 있어 넓은 정원을 제공하기도 하였으니 글자 그대로 전망 좋은 그런 집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다 통학차가 오는 시간에 조금 늦게 집을 나서다가도, 기차의 기적소리를 들으며 뛰기 시작하면 기차를 탈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었다.
나는 이런 기차를 타고 5년 정도나 통학을 하였다. 그때마다 기차는 콩나물시루 속과 같이 빽빽하였지만 매일같이 고맙게 타고 내리던 기차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 주변의 풍경에 대한 그리움을 느낄 순간적 여유도 없이 그냥 그렇게 타고 다니던 기차였었다. 그런 우리에게 노래 고향역의 가사는 아름다운 그림을 선물해주는 고마운 위안이 되었다. 곡이 쉬워 따라 부르던 우리들에게 기차 통학을 하던 마음이 더해지니, 노랫말은 그야말로 딱 들어맞는 그런 노래였을 것이다.
황등역은 호남선 익산에서 대전, 서울 방향으로 나있는 첫 번째 역이다. 거리상으로 익산역과 너무 가까운 관계로 이제는 버스나 트럭을 손쉽게 이용하지만 예전에는 그야말로 교통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황등이 여타 면과 비교하여 특별히 나은 것은 없다하더라도, 인구도 많으며 교통이 편리할 뿐더러 물동량 또한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인근의 농산물이 집합되어 타지로 실려 나갔고, 그 유명한 황등돌이 실려 갔던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다.
황등역은 동쪽으로는 황등산을 끼고 돌며 삼면이 들판으로 이어진 그런 형상이었다. 대전방향인 북쪽으로는 역사를 지나면서 방아다리를 벗어나면 우측으로 돌아가는 굽은 모양이며, 익산 방향인 남쪽은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가기 때문에 그냥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용하는 손님들로는 황등면은 물론이고, 동쪽의 삼기면, 서쪽의 서수면, 서북쪽의 함라면 주민들이 있었으니, 이들에게는 밖으로 통하는 생활의 관문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황등역에서 기차를 타기 위하여 멀고 지루했던 논길 밭길을 걸어오던 기억은 힘겨운 고통이었을 것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바지에 빗물이 튀고, 바람에 날려 오는 비는 이내 저고리까지 적셔버리던 그런 걸음이었을 것이다. 눈이 오는 날이면 옷이나 머리에 쌓인 눈이 녹아 축축이 젖어 들 때까지, 그냥 그렇게 얼마가 남아있는지도 모르면서 걸어야했던 그런 길이었을 것이다. 가을에는 비나 눈이 오지 않아도 논둑 길가에 맺힌 이슬로 바지가랑이를 적시고, 풀잎이 뜯겨져 신발에 묻어 엉키던 힘겨운 걸음이 이어졌을 길이다.
아침 일찍 도착하여 기차 시간보다 여유가 있었을 때에 볼 수 있었던 역 주변의 풍경은 그냥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길옆 오막살이에는 텃밭도 있고, 거기에는 옥수수도 있었다. 굴뚝에서는 밥 짓는 연기도 났었고, 모내기가 끝난 논에서는 파릇파릇한 잎들이 날로 생기를 찾아갔으며, 미처 끝나지 못한 보리타작은 들판 군데군데를 누런 모습으로 색칠하고 있었다.
여름에는 백길이라는 마을 어귀에 서 있는 미루나무에서 매미가 힘차게 울어댔었다. 역사 정원에는 철따라 피고 지는 예쁜 꽃들도 많이 있었다. 기차를 타러 나가면 송하동이 마주 보이는 플랫폼의 서쪽이 텅 비어 논과 바로 이어지는 그런 형상이었다. 거기에는 측백나무를 심고 보기 좋으라고 키를 일정하게 잘라주면서 줄어 그어 놓았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리고 그 측백나무 사이사이로는 가냘프지만 정겨운 코스모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코스모스는 측백나무 사이뿐만 아니라 눈 둑길에도 늘어 서있었다. 가지런한 코스모스는 철로 옆 길가에도 빠지지 않고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옆길은 별도로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니었지만 황등역을 벗어나고 들어오는 모든 구간에는 영역을 표시하는 듯 그렇게 버티고 늘어서 있었다.
색색으로 예쁘게 뽐내던 연약한 코스모스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이리 한들 저리 한들 물결치기 일쑤였다. 그렇게 제 멋대로 흔들거리며 놀던 코스모스들도 기차가 지나 갈 때에는 우렁찬 바퀴소리에 놀라는 듯 하였다.
이 소리야 어찌 어제 오늘 뿐이었겠는가. 조상 대대로 들어오던 소리로 벌써 씨앗 속에서부터 함께한 환경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이제는 귀에 익고 만성이 되었을 법도 한 기적소리와 철마의 둔탁한 움직임 소리에, 아직도 깜짝깜짝 놀라던 것은 마치 나와 같이 마음이 여린 탓은 아니었을까.
정겨운 마음에 손을 내밀어 꽃잎이라도 따려치면 이내 몸을 추슬러 한 발짝 뒤로 물러서 버린다. 그러다가 더 이상 자신을 헤칠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던 코스모스였다. 황등역의 코스모스는 그렇게 자신을 지켜 왔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도 다음 해에도 그 자리에서 꿋꿋하게 생에 대한 희망을 이루어갔다.
지금은 기적소리가 들린다고 하여 집에서부터 뛰어가서 기차를 탈 일이 없어진지 오래다. 시간을 정해놓고 오고가던 기차 대신 내가 필요로 하면 언제든지 탈 수 있는 교통수단이 생긴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비록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일어난 것으로, 타면서 바로 내려야 하는 단 한 구간의 기차 이용을 더 이상 불필요하게 만드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제 황등역은 거의 폐쇄 단계에 이른 역이다. 주 정차역에서 간이역으로 변하더니 급기야 관리인이 없는 임시 간이역으로까지 되고 말았다. 얼마 전에는 고향역의 추억을 되살리려 일부러 황등역을 찾아보았던 적이 있다.
반가운 마음에 재빨리 역 대합실로 뛰어 들어섰으나 옛날의 추상같았던 역무원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기차를 타려고 기다리는 단 한 사람의 손님도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 기차표를 팔았던 창구에는 언제 올지 모르는 손님을 위하여 작은 안내문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이런 역에서는 기차표를 사지 않고 기차를 탈 수 있다. 예전의 철저한 차표 검사에 비하면 얼마나 자율적이고 인간적인 관리방식인가. 그러나 줄을 서서 차표를 사고, 대합실에 앉아 기다리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위로하던 모습을 볼 기회조차 없어져 버렸다.
기차를 타러 나가면서도 줄을 서고, 차표를 끊던 모습이 사라진 것은 이보다도 더 이전의 일로 추억의 한 토막이 되고 말았다. 기차를 타고 통학하는 학생들이 단 한 명도 없는 말뿐인 통학차가 하루 두 번씩 오다가다 서는 허울역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가요 고향역을 작곡하고 작사한 임 종수씨는 이 황등역에서 기차를 타고 통학을 한 적이 있었다. 작자는 원래 순창 출신으로 황등역을 이용한 기간이 대략 1년 6개월 정도의 길지 않은 동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작자는 당시의 짧은 정겨움을 오랫동안 잊지 못하여 대중가요의 그 중심에 황등역을 앉혀 놓았던 것이다.
삼기면에서 황등역을 거쳐 당시의 이리까지 통학하던 길은 가난한 자에게는 고달픈 길이 되었고, 배고픈 자에게는 떠 올리고 싶지 않은 그런 길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의 세상이 아닌 작자 당시의 세월에는 분명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떠 올리기 싫은 과거보다도 더 잊을 수 없는 것은 황등역의 코스모스였음을 느낄 수 있다.
이 노래는 1971년 작곡되고 1972년 본격적으로 불리기 시작하면서 바로 나 훈아의 대 히트곡이 되었다. 당시 인기있는 가수가 부르기도 하였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정겨운 고향을 떠 올리는 방법으로 코스모스라는 정취있는 꽃을 대입시켰고, 거기에 다시 어머니라는 만고불변의 고향 이미지를 옮겨 놓았던 것이다.
당시는 도시 산업화에 따라 농촌에서 대거 도시로 향하던 시기였었고, 갑작스런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던 근로자들이 고향이라는 단어만으로도 남몰래 눈물짓던 분위기였었다. 그럴즈음 우리 대한민국의 공업부흥이라는 장래를 걱정하며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일하던 모든 이농 젊은이들에게, 황등역의 코스모스와 임 종수씨의 어머니는 공감을 주기에 충분하였었다.
고향역은 이렇게 퍼져 나갔다. 이농한 모든 사람들의 입과 입에서 고향역이 떠나지 않았다. 그들의 가슴속에는 항상 고향을 잊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잊은 것 같다가도 불현듯 다시 떠 올릴 수 있는 고향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고향역을 사랑하였던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정겨운 고향을 일깨워주는 황등역이지만 정작 내게는 고향의 맛을 느낄 수 없게 한다. 황등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는 쓸쓸한 역사만이 뎅그랗게 다가오고 있다. 외로운 석양의 노을빛이 대합실 깊숙이 드리워져도 코스모스는 보이지 않는다.
황등역이라는 글씨는 기차를 타고 통학하던 당시에 보았던 것과 같은 문자인 것이 분명한데 예전의 고향역이 아니다. 역사는 현대식 건물로 고쳐 지어졌지만 만인의 고향역 황등역이 새롭게 고쳐 지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쩌면 몇 사람 당신들의 천국을 위하여 고쳐진 것은 아니었을까.
고향역이란 모름지기 고향을 지키는 사람들, 고향역을 이용하는 사람들, 고향을 지키려 세금을 낸 사람들을 위하여 거듭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직도 황등역은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연호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2006.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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