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나의 주변 이야기

셋방살이의 슬픈 기억

꿈꾸는 세상살이 2006. 10. 29. 12:59

아주 오래 전 일이다.

 

내가 단칸방에서 세를 살 때의 일이니 아마도 24년 전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 때 우리는 남의 셋방을 살고 있었다. 그 집은 주인집을 양옥으로 멋있게지어놓고 살았다. 그렇게 살다보니 울 안에 조금 남는 터가 있었던지 거기에 방을 들여놓았다. 물론 자기는 설계에 의한 제대로 된 집이지만 우리는 그냥 일자로 된 셋방이었다.

 

막집으로 된 셋방은 네 집이나 되었다. 그리고 안채의 뒷방은 따로 처마를 달아내어 방 세개를 더 만들었다. 그러면 주인을 제외하고도 일곱 집이나 사는 다세대 가구였다.

거기에는 나처럼 회사에 나가 월급을 받는 사람이 세명, 그리고 저녁에 시장에 나가서 먹고 마시는데 근무하는 사람도 한 명, 환경 미화원 한 명, 그리고 두 집은 항상 들락날락하는 정도로 수시로 바뀌어 살았다.

 

주인어르신네는 당시 공무원으로 그런대로 폼을 내고 살았다. 물론 공무원이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 주인이 그렇다는 것이다.

당시는 신 도시의 개발 붐을 타고 있던 때이니 아마도 주인은 먹고 살기는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같은 서민은 그냥 월급 받아서 먹고,  먹고 살다가 월급받고 하는 그런 생활의 연속이었다.

 

주인은 잘 먹고 살만한데도 항상 절약하고 아끼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들어 사는 사람들에게 대한 배려는 별로 기억이 없다. 전기 요금이 나오면 거기에 살던 가구 수대로 분할하여 내는 방식이 유행이었는데 그거야 주인 몫을 제껴두고 나서 나머지로 분할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하지만 주인은 식구수나 사용양을 따지지 않고 그냥 가구수로 분할하니 결국은 주인이 더 많이 쓰면서도 더 적게내는 그런 꼴이 되었다.

 

하지만 다른 세들어 사는 사람들도 별 말은 없었다. 물론 따지고 보면 막대한 부담이 되는 그런 돈은 아니었기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얄미운 것은 얄미운 거였다.

 

수도요금도 분할하여 내는 방식은 마찬가지였다. 자기는 식구도 많고 빨래도 많으면서도 항상 세들어 사는 사람에게만 절약하라고 다그치기도 하였었다. 빨래를 하다가 조금만 물이 넘쳐도 이렇게 하니 수도요금이 많이 나오는 것 아니냐고하면서 수도꼭지를 잠그기 일쑤였다. 옳은 말을 하는데도 주인이 세들어 사는 사람에게 하는 말은 그냥 비수가 되어 꽂히기 일쑤다. 낭비하는 물을 줄이자는데 무슨 할 말이 있었을까. 그래도 얄미운 것은 얄미운 것이었다.

 

여름이 되면 자기는 잘된 설계로 지은 집이라 단열도 잘 되고 천장도 높아서 그런대로 견딜만 하였다. 반면 우리는 지붕도 낮고 천장에 단열도 안되어있어 한낮의 열기가 달구어지면 밤새도록 그 열을 지탱하고, 고스란히 방안으로 내려오는 그런 구조였다. 나는 두눈을 꼭 감고 옥상으로 물 호스를 끌어올려 물을 뿌려댔다. 약간의 요금이 더 나올지 아니면 그냥 그정도일지 모르겟지만 그래도 물을 뿌려댔다. 안개처럼 시원하게 뿌려진 물은 수고에 대한 보람도 없이 그냥 힘없는 물방울이 되어 마당으로 흘러 내려왔다. 그래도 뿌리고 또 뿌렸다. 이러면 조금이라도 시원해질까하는 바램에서다. 당시 돌도 안된 아이가 한낮 찜통에서 고생할 것을 생각하니 내가 주인과 싸우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때문이었다. 매일같이 출근 전에 이렇게 뿌려대는대도 주인은 몰랐나보다. 절약에 절약이라고 강조하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낭비였지만 다른 아무 말도 없이 여름이 지나갔다.

 

전열기구는 냉장고와 텔레비젼외에는 사용을 금하기도 하였었다. 자기는 각종 전기제품을 다 사용하면서 남들은 사용하지 못하도록하였다. 이런 전기제품을 사용하니 전기요금이 많이 나온다고 다음달에는 분명히 더 많은 요금을 할당하기때문에 그 명을 거역하기도 힘들었다. 그렇다고 자기는 전기제품을 쓰면서 왜 나는 못쓰게하느냐고 대놓고 따질 형편도 아니었다.

 

한창 유행하던 전기 믹서는 당시 가장 간편한, 그리고 가장 편리한 그러면서도 가장 소형인 기본 전기제품이었다. 이런 것 하나를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주인이 외출하기만 기다리던 그런 시절도 있었다. 그나마 조금 머리를 써서 꾀를 냈다고 하는 것이라야 고작 주인이 전기제품을 사용할때 우리도 같이 사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그리 녹녹치 않았다.

재빠르게 감지하여 주인과 함께 전기제품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멈추는 시간은 맞출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지금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그 시간때문에 미리 만든다고 하는 것은 재료의 준비라든지 집안내 형편이 그리 허락하지 않은 수가 더 많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잘못 사용하다가 들키기도 여러번이니 그 또한 미안하기는 매 한가지였다.

자구책으로 방안의 불을 끄고 전기제품을 사용하면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이불도 뒤집어 씌우고 사용하기도 해보았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주인집 아주머니의 눈은 피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캄캄하니 불을 켜 달라고 보채는 아이는 우리 집에 사람이 있소하는 광고나 같은 것이었다.  

셋방은 부엌을 거쳐서 방에 들어가도록 되어있었다. 마당에서 미다지 문을 열고 부엌으로가면 바로 연탄 아궁이가 있고, 다음은 바로 방이다. 마당에서 방까지는 거리로 쳐봐야 겨우 2m  남짓이다. 방에서 돌아가는 전기제품의 소리는 야간의 전차바퀴소리 만큼이나 커서 불안하기 그지없다. 거기다가 부엌문은 항상 열어 놓아야 한다. 연탄아궁이의 가스를 밖으로 몰아내기 위한 자구책이다. 이런 상황에서 문풍지 하나를 두고 들려오는 소리는 고요한 밤하늘에 아름다운 멜로디가 되어 음악회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일을 내고 말았다. 부엌 문을 조금만 열어놓고 방문은 꼭꼭 닫은 상태에서 믹서를 돌렸다. 물론 방안의 불은 다 꺼놓은 상태다. 기계는 돌렸지만 온 신경은 밖으로 쓰인다. 누가 와서 엿듣지는 않는지, 발자국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다. 물론 믹서는 이불로 덮어서 혼자 돌아가도록 하고 있었다.

부엌에는 아무도 없지만 방에서는 음식을 만드느라고 도마며 칼과 주발 등 여러가지 재료들을 갖다 놓은 상태였다. 안절부절 하면서 일어나서 문틈으로 밖을 살피던 중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그것도 다름아닌 우리집 방에서 픽하며서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정전이 된 것이다. 갑자기 여러 사람들이 몰려 나왔다. 지금 밥을 하여야 하는데 불이 나가버리면 어떻게 하느냐는 둥, 막 재미있는 프로를 보고 있었는데 왜 정전이냐는 둥, 여섯 집이 나와서 각자 한 마디씩 해대니 그야말로 도때기 시장이 따로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전기제품을 쓰다가 그랬다고 나서서 말하기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갑자기 주위가 깜깜해지고 방안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가 하면 뭔가 파란 불꽃이 튀면서 피식하였으니 우리 아들녀석이 놀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하였다. 세상에 이게 웬 일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집안에 아무도 없던 것처럼 위장을 하고 있었는데 애기가 울고 이런 저런 분위기로 보아 수상하기 이를데가 없었다. 우는 애기가 왜 우는지 원인을 살피고 달래주어야 하는 것이 부모된 도리이건만 어찌하여 우는 아이 입을 틀어막고 소리를 죽여야 하였던가. 세상에 이런 부모가 나 말고 또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겨우 겨우 우는 애를 달래도 얼러서 조용히 시키고 밖의 동태를 살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내용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들 유야무야 자리를 떠나 자기 집을 돌아갔다. 집 주인 아저씨가 한전에 다니고 있어서 휴즈가 나간 것쯤은 그냥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고비가 넘어갔다.

다시 전등이 켜지고 나중에 알아보니 우리 아들녀석의 소행이었다. 방안에 있던 커다란 부엌 칼을 집어 들고는 방안에 이리저리 어지럽게 널려있던 전기줄을 향하여 그냥 내리쳤던 것이다. 그 바람에 놀란 엄마는 깜깜한 상태에서 허둥대다가 그만 잘못하여 믹서 전기줄을 건드렸고, 믹서는 화답이라도 하는 듯이 너머져서 그만 유리 통이 깨지고 말았다.

 

정전 상태에서 식재료는 엎어지고, 믹서는 깨져서 온통 방안에 물이 흥건하고, 소리나지 말라고 덮어 놓았던 이불은 고맙게도 그 물이 더 이상 흘러가지 못하도록 모두 흡수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우리는 한참동안 전기제품을 사용하지 않았다. 냉장고와 텔레비젼외에 또 다른 전기제품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조금만 더 배려를 해 주었더라면 우리도 이불 속에서 믹서를 돌리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하는 생각을 하니 그 시절이 참 서글픈 기억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