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나의 주변 이야기

셋방살이는 텔레비전도 셋방살이다

꿈꾸는 세상살이 2006. 11. 10. 18:29
 

셋방살이는 텔레비전도 셋방살이다.


신혼살림을 차렸지만 보증금도 없는 단칸 월세방이라서 살림을 많이 장만할 수 없었다. 요즘 같으면 문제가 다르겠지만 기본적인 것만 마련하였다. 따지고 보면 방문제가 아니라, 절실한 원인은 돈에 있었기 때문에 원치 않았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만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내용을 하나하나 열거하기에는 서글픈 기억을 재생하는 것 같아 덮어두고 싶다.


집은 마당가에 지어놓은 막집으로 부엌을 거쳐 방으로 들어가게 되어있었다. 조용조용 틀어놓아도 라디오 소리인지 텔레비전 소리인지는 지나가던 아이들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텔레비전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남의 시선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신혼이라고 지금 막 이사 온 살림이니 한 집에 사는 다른 여섯 가족들은 오죽이나 관심도 많았을까. 지금 내가 다시 그렇다면 아마도 부끄러움을 많이 탓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남이야 뭐라고 하든 말든 세상살이라는 것이 다 그런거지 뭐, 그냥 있으면 듣고, 있으면 보고 그러면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였다. 어디까지나 낮에는 직장에 나가는 남편 혼자의 생각으로만 말이다.


얼마가 지난 후 우리도 드디어 텔레비전을 사기로 하였다. 그래도 고마운 것은 입사 초년생이기는 하였지만 고정적으로 받을 수 있는 월급이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었다. 우리가 거주하던 곳은 창원시 용지동 구주택지로 지금은 상업지역으로 바뀌어 완전 딴 세상이 되어있는 곳이었다. 아무리 구주택지라 하여도 인근에 상가가 있고, 번화가도 있었으니 가전제품 판매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상권은 마산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집에서 마산으로 나가는 길은 시내버스 32번, 18번, 22번 이렇게 세 종류로 기억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다니던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마산의 유명한 가전제품 판매장까지는 무려 약 한 시간이나 걸리는 긴 여행이었다. 

이런 장거리 여행을 지리도 알지 못하는 새댁이 혼자 찾아 가기도 그렇고 하여 벼르던 중, 마침 안집에서도 텔레비전을 사기로 하였다는 낭보가 접수되었다.

새댁이 남편 아닌 사람을 따라 나서기는 좀 머쓱하기는 하였지만, 어디 다른 아는 곳이 하나도 없으니 그냥 주인집 의견을 따르기로 하였다. 자기가 잘 아는 사람이 마산에서 가전제품을 판매하니 안내를 해 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는데다, 오히려 고마워해야할 상황이었다. 역시 00에 다니시는 아저씨는 발도 넓고 아는 것도 많은 것 같았다. 


주인집 아저씨네는 작고 아담한 21인치 텔레비전을 샀고, 우리는 큼직하고 멋있는 24인치 텔레비전을 샀다. 물론 안집에 기죽지 않으려고 일부러 보란 듯이 큰 것을 산 것은 아니었다. 고르고 고르다보니 그렇게 결정을 한 것뿐이었다. 안집 아저씨네는 알뜰 가족이라서인지 가져간 돈이 텔레비전 가격에 모자랐고, 급한 김에 우선 우리 돈으로 먼저 계산하고 집에서 정산하기로 하였다. 아내의 발걸음은 가벼웠단다. 지금 표현으로 말하면 룰루랄라... 바로 그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결혼 때 혼수로도 장만하지 못한 텔레비전이었건만, 자신이 아끼고 절약하여 모은 돈으로 샀다는 기분은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집으로 돌아 온 다음에 발생하였다. 빌려간 돈을 정산하여야 하는데 아무런 말이 없어 일부러 찾아가서 말을 걸었다. 으레 빌려간 사람이 바로 돌려주면서 고맙다고 잘 썼다고 하여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빌려준 사람이 머리 구부리게 하고, 그것도 자기 집에 세 들어 사는 가난한 신혼부부에게 거드름을 피우는 것은 무슨 심보란 말인가.

그런데 알고 보니 원인은 전혀 다른데 있었다. 자기는 21인치를 샀는데 24만원이고, 우리는 24인치를 샀는데도 19만원인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한참 계산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판매점에서 반대로 계산한 것이 확실하므로 자신이 빌린 돈은 주지 않아도 되며, 오히려 차액은 어떻게 계산하여야 하는지 혼자서 궁리하고 있었단다.

세상에는 참으로 이상한 계산법도 다 있다. 판매금액 계산은 판매점 직원이 다 알아서 교통정리를 해주는 것이지, 어째서 돈 빌려간 사람이 판매점 주인하고도 아닌, 물건 산 사람하고 흥정을 한다는 말인가. 그러면 그때 매장에서 금액을 할인해 달라고 하든지 해야지, 힘없어서 거절도 못하고 돈을 빌려준 새 색씨한테 왜 어거지 논리를 펴느냐 말이다.


천리타향으로 홀홀단신 이사하여 아는 사람이 없어 외로운 판에 이런 대접을 받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러나 목소리도 작고 힘도 약한 처지에 무슨 항변이 필요하랴.

아내는 조용히 해결하기위한 방법으로 정히 그렇다면 텔레비전 판매장에 직접 전화를 해서 물어보면 될 것 아니냐고 말하니, 그 양반은 이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자고 하였다. 그러면 자기가 돈을 더 주지 않아도 될 것이 분명하니 전화하는 동안에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였다. 솔직히 결과는 들어보나 마나다. 집 주인은 부자로 잘 사니 작지만 그래도 폼 나는 것을 선택하였고, 우리는 덩치만 컷지 사실은 보급형으로서 기능이 아주 많이 빠진 그런 제품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훗날 외국어 공부용으로 외국방송을 들을 수 있다는 접시 모양의 텔레비전 위성방송 안테나가 한창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도 큰마음 먹고 접시를 달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직원은 콘크리트 벽에 힘들게 고정을 한 다음 텔레비전에 연결하는 과정에서 포기하고 말았다. 이 텔레비전은 보급형이라서 외부 영상 입력단자가 없다나 뭐라나. 나도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럼 텔레비전을 뜯고 안에서 직접 선을 연결하면 되는 것이지, 꼭 입력 단자라는 강아지 젖꼭지가 있어야 연결이 되느냐고 말이다. 그래도 결국은 내가 지고 말았다.


그런 텔레비전이 24년이 지난 올해 초 고장이 났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 집의 거실 한 가운데 텔레비전이 있어야 할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참으로 긴 시간을 나와 같이 한 물건이다. 그래서 쉽게 버리기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 시절이 좋아서 간직하고 싶어서도 아니다. 아이들에게 절약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기 위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강아지가 자기 식구라는데, 나도 굳이 말을 하자면 힘들고 어려운 때 나를 위로해준 물건이라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나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천수를 누리고 간 텔레비전이지만 그래도 마음은 애틋하다. 이런 생각도 다른 사람과 상관없이 그냥 나 혼자 만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것도 조만간 교통정리 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아파트 뒤 베란다에는 아직 상자를 개봉하지 않은 텔레비전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그렇게 있은 지 벌써 오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