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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비는 어떤 맛일까

꿈꾸는 세상살이 2006. 12. 21. 11:07
 

단비

 

수현이는 우산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지난봄에 우산도 없이 비를 맞았다고 어머니한테 야단을 맞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러나 동네 고샅에는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른이나 아이들 할 것 없이 모두 비를 맞으면서도 즐거워하는 모습이 확실합니다.

 

수현이는 혼자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저렇게 비를 맞으면 감기 걸리는 것은 틀림없는데 왜 우산도 없이 돌아다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우산이 없다면 집에 남아도는 우산을 하나쯤 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수현이도 이 비가 반가운 것은 다른 사람들과 같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학교에 다니는 데도 신작로에서 나는 먼지 때문에 불편이 많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비는 어쩌면 기다리던 손님이 찾아 온 듯 반가운 것입니다. 

 

수현이는 방금 동네를 한바퀴 돌고 들어 왔지만,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는 다시 밖에 나가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번 단비에  많은 쌀들이 통통해 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 입니다. 그래서 수현이는 쌀 나무가 이 비를 먹고 어떻게 통통해 지는지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비를 맞고 돌아다니던 사람 중에서 아이들은 하늘을 향하여 입을 벌리고 비를 받아먹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지금 내리는 비가 정말 단비였을지도 모르는데 수현이는 받아먹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비는 누가 뭐래도 단비가 아니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습니다.

 

부모님은 수현이가 밥을 먹을 수 있게 된 뒤로는 사탕을 먹지 못하게 하셨고, 거기다가 단 것은 무엇이든지 먹지 못하게 이르셨습니다. 그 이유는 단 것을 먹으면 이가 썩고, 특히 어릴 적에 이가 썩으면 커서도 이가 고르게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수현이는 콜라든 사이다든 음료수는 먹지 않는 버릇이 생겼고, 과자나 사탕 심지어는 크림도 먹지 않는 습관에 젖어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를 마치 설탕이라도 녹여 놓은 듯이 단비가 온다고 말하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아버지께서 분명히 단비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 사실인 듯도 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부모님 몰래 단 것을 먹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 같은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비라고 하더라도 어떤 때는 그냥 비가오고, 어떤 때는 단비가 온다는 것이 신기하게만 생각됩니다. 혹시 달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설탕 녹인 물을 비로 내려 주는지, 아니면 빗물이 설탕사이를 지나면서 설탕을 녹여 오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설탕은 달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성인병을 근본적으로 없애기 위한 수단으로 우주에 내다버린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달나라에서 내다버린 단비를 지구에서는 고맙게 사용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이들이 부모님 모르게 받아먹는 비이든, 메마른 신작로에서 먼지를 가라앉히는 비이든, 가뭄에 시들어가는 작물들이 목을 축이는 비가 되든지 모두가 다 지구상의 유용한 비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수현이도 얼른 대문 밖에 나가 비를 받아 먹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비에서는 단맛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입안을 헹구고 다시 비를 받아먹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단맛은커녕 다른 아무런 맛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집 앞 텃논에서는 맹꽁이가 울고 있습니다. 메마른 숲을 떠나 습한 논으로 내려왔던 많은 개구리들은 다시 산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냇가에서는 물고기들이 새로운 물맛을 찾아 뛰어 오르고 있습니다.

텃밭에 있는 아욱이며 상추도 비를 맞고 생기가 돌아 푸른빛이 영력합니다. 울타리에 걸쳐져있던 호박과 지붕위에 널려있던 박 잎은 물기를 머금고 팽팽해졌습니다.

 

이 비가 수현이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계속되던 불볕더위가 땅을 달구어 놓아 숨이 턱턱 막히던 더위도 한줄기의 비로 씻은 듯이 식었습니다. 몇날 며칠을 울어대던 매미의 울음소리도 이 비로 조용해졌습니다. 방학 숙제를 위해 매일 매일 물을 주던 화단에 더 이상 물을 주지 않아도 좋게 되었습니다.

 

한참만에 내린 비이기는 하지만 수현이는 어디에서든지 비의 단맛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설탕 맛이든 꿀맛이든 단 맛이 전혀 나지 않는 그냥 비 일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이 비를 단비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른들이 느끼는 비와 아이들이 느끼는 비는 다르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소풍가는 날 비가 오면 아이들에게는 정말 기분이 잡치는 날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에게는 아침에 소풍을 출발한 후 비가 오면 기분이 그런대로 괜찮은 날입니다. 그 이유는 비가 오는 날은 어차피 농사일도 못하지만 아이들 소풍에 빠지지 않으니 둘 다 만족을 시킬 수 있어서 다행인 날이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이런 날도 단비가 온다고 말합니다. 오랜만에 쉬고 싶었는데 제대로 쉴 수도 있고, 거기다가 아이들이 자란 모습도 확인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고마울 수 없는 비라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어떤 날은 농사에 이롭지 않는 날인 때도 있었는데 그래도 단비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마다 비를 받아먹어 보아도 역시 단 맛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현이는 어떤 것이 진짜 단비인지 알지 못합니다.

 

오늘 내린 비도 아버지께서 그냥 단비라고 하면 단비라고 생각하여야 할 것 같았습니다. 수현이 생각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단비를 알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단비가 오는지 쓴비가 오는지는 수현이 생각이 아닌 아버지 생각에 맞추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제는 어느 비가 오더라도 수현이에게는 걱정이 없어졌습니다.

 

어느 때에 비가 온다고 하여도 비를 기다리던 식물들에게는 단비가 될 것이고, 추수를 하여야 하는 농부에게는 쓴비가 될 것입니다. 수현이가 이러한 간단한 원리를 이해하려면 앞으로도 여러 차례 더 비를 맞으면서 학교도 가야하고, 논이나 밭에서 일하시는 부모님을 위하여 우산을 들고 마중을 나가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어른이 된 후에야 느낄지도 모르는 일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