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아이들

군대는 나 혼자 가는 것이 아니건만

꿈꾸는 세상살이 2007. 1. 6. 07:32
 

지난 토요일에 모임으로 늦게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이상한 냄새가 난다. 곰국을 곰는 냄새도 아니고 젖갈을 달이는 냄새도 아니다. 그런데 아내는 저녁 10시가 넘었는데도 주방에서 뭔가 열심히 만들고 있고, 식탁에도 몇가지 음식들이 늘어져있다.혼자 다녀온 미안한 마음에 슬그머니 다가가 뭐하느냐고 물어보았다.


내일 아들한테 면회를 가려고 준비를 하는 거란다. 그러면 나도 같이 가야 되는 것 아닌가. 가다가 먹을 것하며, 가서 먹을 것하며 이것저것 준비하는데 벌써 자정을 넘기고 말았다. 할 수없이 그냥 대충 정리하고 잠자리에 든다. 순전히 내일아침 일찍 떠나기 위한 처방이다.


그러나 이리뒤척 저리뒤척일 뿐 쉽게 잠에 빠져들지 못한다. 그렇지 않아도 약한몸에 잠을 잘 못 자는데, 거기다가 아들 면회를 간다니 밤새 들락날락이다.

짧은 시간 기나긴 밤도 그럭저럭 새더니만 다시 부산한 움직임의 연속이다. 가서 내무반원들이 나누어 먹을 귤도 한 상자 사야 된다고 하여 시장에 들렀다. 마침 5일장 날이다. 노점에는 이른 식전부터 벌써 자리를 잡기위한 쟁탈전이 한창이다. 인생에 있어 삶은 바로 고해가 아니던가.


집을 나선 시각은 24일 일요일 오전 8시 정각, 요즘은 교통이 편리하여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쉽게 도착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래도 네비양한테 물어보고 길을 나선다. 우리 네비양은 오래 동안 같이 살아서 정은 들었지만 최신 유행을 모르는 맹한 구석이 있다. 터치스크린 방식도 아니고 푸쉬버튼식이라서 일일이 물어보려면 짜증이 난다. 그래도 아들한테 면회를 가려는데 이까짓껏 쯤이야 참아야지 한다.


사랑스런 아들을 만나러가는 길은 기분 좋게 달리다가도 길이 막히는 곳이 있었다. 아들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만날 수 없다는 데에 슬그머니 부아도 치민다. 산 넘고 물 건너 달려갔건만 목적지에는 자그마치 6시간 30분 만에 도착하였다. 과연 우리나라도 크기는 크다.

 

일요일 오후 1시30분부터 아들과 연락을 해가며 찾아가는데 그때까지 점심을 먹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늦어진다고 점심을 먹고 있으라고 해도 알았다고만 할뿐 그냥 그대로다. 부모님과 같이 먹고 싶어서 그런다는데 다른 할 말도 없다. 눈물이 날 지경이다. 우리는 먼길 간다고 아침도 든든히 먹었고, 중간에 이것저것 군것질도 하고 음료수도 마시고, 그렇게 배는 굶기지 않고 있었던 것이 미안해진다.

 

 

누군가에게 물어 볼 곳도 없는 길이라고 가끔씩 전화로 길을 안내해주던 아들 덕에 쉽게 찾았지만 막상 도착하고 보니 서글픈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나는 독립대대에서 군대생활을 하였지만 민가도 있고 북한강변을 끼고도는 국도변에 있어서 경치도 좋은 그런 곳이었다.

나는 거기서 훈련기간은 별도로 하고 37개월을 근무하였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말했다. 너희처럼 건강하고 똑똑하고 명석한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고맙다고 하였다. 만약 너희들이 사회에 있으면 아마 자기 몫은 분명하게 해낼 사람들인데 여기 와서 나라를 지킨다고 쳐박혀 있어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니 여기에 와있는 것을 불평불만하지 말라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 대신 몸과 마음이 연약하고, 영과 육이 병든 사람들을 불러다 놓으면 이 나라를 어떻게 지키겠느냐고 말이다. 그래서 국가에서도 너희처럼 훌륭한 사람들만 골라서 불렀고, 사회에서도 필요하지만 우선 국가가 더 급하게 필요하여 불러들인 것이니 기죽지 말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군대에서 썩고 있다는 생각은 감히 엄두도 낼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는 민가도 없고, 주변 환경도 어슬퍼 보인다. 더구나 막사는 산머리의 9부 능선 위에 위치하여 어딘지 외롭고 쓸쓸한 느낌을 준다. 부대 앞에는 병력 하차지점이 있어 자기 부대를 가는데도 항상 걸어서 올라가야하는 그런 곳이었다. 하늘에서는 마침 눈이라도 오려는지 을씨년스런 날씨가 주변을 더욱 황량하게 만든다. 그래도 예나지금이나 군인들의 사기는 충천하여 국가를 사랑하고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마음은 같을 것이리라.


아들을 태우고 먼저 식사를 해결하여야 하였다. 다시 거슬러 내려와 점심을 먹는 시간은 오후 3시30분을 지나고 있었다. 자식, 얼마나 배가 고팟을까! 그런데 점심을 먹다가 얘기를 들어보니, 글쎄 이 녀석이 아침밥도 먹지 않았단다. 이런 세상에... 이런 때는 어떻게 위로를 해주어야 하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물론 강제로 먹지 못하도록 한 것이 아니고, 전날 매복을 갔다 왔는데 와서 보고하고나니 시간도 어중간하여 아침밥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아침밥을 먹지 않은 것은 아들인데, 왜 내 속이 쓰린지 모르겠다.


아들은 기숙사 생활을 6년이나 하다가 군에 갔으니, 군 생활이나 식사 등 닫힌 세상의 생활도 어느 정도는 견디는데 이력이 나 있다. 그래서 그냥저냥 생활하는 것은 견딜만 한 것처럼 보인다. 그나마 부적응에 대한 한 가지 고민을 던 것 같다. 그렇지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것저것 군 생활에 대한 궁금증이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쉬운 단어만을 골라서 이야기하는데도 모든 게 처음 듣는 단어들이라 애 엄마는 끝없이 질문을 해댄다. 결국 아들은 엄마의 유도심문에 걸려들고 말았다.


매복은 저녁에 나갔다가 밤을 새우고 아침에 돌아오는데 잠을 자면 안 된다는 비밀 아닌 비밀을 털어놓고 말았다. 이 대목에서는 아~ 하고  현기증이 나나보다.

 

 

초저녁에 벌써 꾸뻑꾸뻑하는 꾸벅이가 들으니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끼는 것이 엄마라는 증거인가. 게다가 메리야스에서부터 최후에 걸치는 방한복까지 8벌을 껴입는다는 말을 듣고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12월 들어 이미 여러 차례 다녀왔는데 올 겨울같이 따뜻한 해에 그래도 춥다고 하니 이내 고개를 돌린다. 자식, 어차피 해결하지 못할 일이라면 그냥 듣기 좋게나 말할 것이지 왜 이리 맹하게 대답해가지고는... 그러니 유도심문에 걸려든 게지. 내가 미리 교육을 시키지 못한 것도 후회가 된다. 아들이 군데 간다고 할 때 엄마는 반대하는데 내가 적극 찬성하여 밀어 부쳤으니 답변이 더 궁색하다.


중략.


그 녀석 얼굴이라도 한 번 보려고 그 먼 길을 마다않고 갔었는데 차라리 면회를 오지 말 것을 잘못했다고 후회를 한다. 그냥 학교 기숙사에 있는 것처럼, 안보고 믿어 버릴 것을 괜히 보았다고 후회를 한다. 돌아오는 길에는 아들에게 당부하였다. 추석이나 설 등 명절에도 집에 오는 것을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하였다. 그냥 짧은 휴일의 외출외박에는 집에도 오지 말고 거기서 놀다가 들어가라고 하였다. 이렇게 말해 놓고 보니 이제 아들 얼굴이나 제대로 볼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우리도 언제 다시 찾아  온다고 약속을 못할 것 같은 그런 기분이기 때문이다. 말은 그랬지만 어디 그럴 수 있나. 내년 여름 방학 때는 다시 찾아가 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나는 성탄 연휴의 빨간 날짜를 택하여 찾아 갔건만 아들은 면회 2일째인 성탄절날 저녁에도 매복을 들어가야 한다며 점심을 먹더니 일어선다. 어제 아침에 매복에서 돌아왔는데, 오늘 저녁에 다시 들어가야 한다니 내가 생각해도 좀 짠하다는 생각이 든다. 

 

 

남들은 군에 갔다와야 사람이 변하고 제 정신이 든다고 하던데, 나는 내가 군 생활 하고왔을때는 잘 몰랐는데, 아들 면회를 갔다와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 같다. 이제는 군인들의 복장만 보아도 아름답게 보이고, 그 속에 숭고함이 배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거기서 나는 땀 냄새도 그윽한 향기로 전해온다. 진정 군생활을 안 해본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이 멋을 알 수 있을까?


아들아! 이 겨울이 다 가도록 건강히 잘 지내거라. 너희같은 군인들이 있어 나라가 존재하고, 덕분에 너의 부모도 이렇게 편히 쉬고 있단다. 그것이 바로 내덕이 아닌 바로 너의 덕임을 잊지 않으마. 달력에 쓰인 빨간 날짜에도 작전을 떠나는 나의 아들이 있기에 나라가 지금처럼 굳건히 버텨오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자랑스런 육군 나의 아들아, 사랑한다. 그리고 자랑한다. 지금 이 나라는 나의 아들이 지키고 있다고.